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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사진설명: 루상촌의 골목과 건물과 사람)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여든 일곱번째는 산기슭의 고건물동네 루상(樓上, Lushang)촌이다. 뒤에 산을 업고 물을 마주한 루상촌의 주변에는 푸른 소나무 울창하고 살찐 벌판이 둘러서며 옛스러운 건물과 순박한 민풍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이루어 그 속에 들어서면 세상과 동떨어진 무릉도원에 이른 듯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루상촌) 기록에 의하면 루상촌은 1494년의 명(明)나라때 형성된 주(周)씨가문 중심의 자연촌이다. 중국 불교명산의 하나인 불정산(佛頂山)기슭에 위치한 루상촌은 옛 건물과 옛 골목, 옛 다리와 옛 우물, 고목과 고서, 옛 무덤과 옛 풍속 등으로 "불정산기슭의 옛 동네"로 인정된다. 천문지리에 능한 루상촌의 조상은 동네를 조성할때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학 원리에 근거해 왼쪽에 청룡(靑龍)으로 인정되는 강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백호(白虎)로 인정되는 산이 있으며 앞에는 주작(朱雀)으로 인정되는 고목, 뒤에는 현무(玄武)로 인정되는 거북산이 있는 곳에 입지를 정했다. 또한 북두칠성의 위치에 따라 마을을 네 개 구역으로 나누고 서남쪽은 주거지로 하고 서북쪽은 놀이구역, 동남쪽은 생산구역, 동북쪽은 무덤지역으로 정했다. 거리와 골목이 말 두(斗)자형을 이루는 주거지의 구도 역시 기이하기 그지없다. (사진설명: 고목과 백학) 숲이 우거진 루상촌의 옛 건물사이에는 백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고목들이 적지 않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1654년에 지은 재동각(梓潼閣)앞의 고목 일곱 그루이다. 직경...
판다번역 2011.10.07 추천 0 조회 2015
(사진설명: 융리의 성문)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여든 여섯번째는 군사목적의 보루동네 융리(隆里, Longli)촌이다. 세월이 흘러 융리는 어젯날 군사보루로서의 위엄은 잃었지만 융리 옛 성 어디서나 볼수 있는 거리와 건물, 다리와 우물, 사당과 무덤 등으로 토템과 종교, 역사와 현실이 함께 하는 역사문화의 활화석으로 부상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아름다운 융리) 융리촌은 원래 용리(龍里)로 불리웠는데 높고 성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융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당(唐)나라때 조성된 융리는 명(明)나라때에 이르러 인근에서 중요한 군사적 보루로 되었다. 600여년의 풍상고초속에서도 완정하게 보전된 융리는 중국 남방에서 가장 잘 보전된 옛 성의 하나로 인정된다. 성안에는 또 도가대원(陶家大院)과 과갑제(科甲第), 무거제(武擧第), 왕씨종사(王氏宗祠) 등 가옥들이 완정하게 남아 있고 성밖에는 왕창령사(王昌齡祠)와 장원교(狀元橋), 장원묘 등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사진설명: 융리의 성과 성문) 1359년에 축조된 융리옛성은 명나라때 남방을 벌하기 위해 북쪽의 군사를 집결하던 곳이다. 따라서 성안의 길목마다에 관문을 세우고 담에는 감시용 망루를 세웠다. 둘레 1500m, 높이 4m, 너비 3m에 달하는 성에는 허와 실을 가릴수 없게 네 개의 성문을 두었고 이름도 각각이다. 동문은 재문(財門), 남문은 희문(喜門), 서문은 수문(水門), 북문은 귀문(鬼門)이다. 따라서 결혼할때는 반드시 동문을 통과하지 북문을 통과하지 않는다. (사진설명: 융리의 삼거리) 융리성안에 들어서면 이 곳의 거리가 다른 곳과 달리 모두 정(丁)자모양의 삼거리로...
판다번역 2011.10.07 추천 0 조회 1976
(사진설명: 조흥채촌의 건물과 고루와 골목)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여든 다섯번째는 고루건물의 고장 조흥채(肇興寨, Zhaoxingzhai)촌이다. 신기한 땅과 오래된 민족, 매력적인 문화를 보유한 조흥채촌은 산 좋고 물 맑을 뿐만 아니라 특이한 수상가옥과 높이 솟은 고루로 모든 사람을 전기적 색채를 띤 세계로 이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조흥채촌) 뭇 산의 품속에 안겨 있는 조흥채촌을 맑은 조흥하가 꼬불꼬불 흐르면서 동네를 세 개로 나누어 놓는다. 멀리서 조흥채촌을 바라보면 사면에 높은 산이 둘러선 마을의 가운데가 움푹 패이고 집들이 선박과 같은 모양을 형성한다. 조흥채촌은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동족의 마을로 인정된다. 동족의 첫 동네 조흥채촌에는 가장 대표적인 동족의 건물들이 장관이다. (사진설명: 조흥채촌의 맑은 물과 사람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조흥채촌에는 고루(鼓樓)가 5개, 다리 5개, 무대건물 5개가 있다. 마을을 흐르는 맑은 시냇물기슭에는 학교와 정부청사, 수상가옥으로 된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조화를 이룬다. 조흥채촌에 들어서면 먼서 일명 화교(花橋)로도 불리우는 풍우교(風雨橋)를 건너야 한다. 조흥채촌에서는 고루가 있는 곳에는 모두 화교가 있고 다리위에 올라서면 무대건물이 보인다. (사진설명: 고루와 함께 하는 화교) 화교가 오늘날의 교량과 다른점이라면 다리위에 지붕을 얹고 지붕위에 기와를 올려 사람들이 이 곳에서 비와 바람을 피해갈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리 교면의 양쪽에는 길게 걸상도...
판다번역 2011.10.04 추천 0 조회 2348
(사진설명: 가까이에서 본 증충촌)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여든 네번째는 동족문화의 첫 동네 증충(增沖, Zengchong)촌이다. 산기슭에 위치한 가옥이 산과 물, 밭에 안겨 있고 동네 중심에 솟아 있는 고루(鼓樓)와 강물위의 풍우교(風雨橋)는 팔괘오행설에 의한 구도를 잘 보여준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증충촌) 삼면에 물이 흐르고 사면에 산이 둘러선 증충촌은 동족의 풍격과 동족문화를 잘 보여준다. 6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증충촌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동족의 고루가 33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증충촌에서 볼거리는 동족최고의 고루외에도 우물 강희정(康熙井)과 다리풍우교, 나무 홍두삼(紅豆杉), 옛 무덤, 청(淸)나라때 지은 키 높은 외벽의 건물 등이다. (사진설명: 증충촌의 맑은 시냇물) 신기하면서도 시적인 분위기를 가진 등충촌을 바닥까지 환히 들여다 보이는 맑은 강물이 삼면으로 에둘러 흐른다. 동네안에는 또 방화용 물길과 연못이 곳곳에 있고 따라서 등충촌은 지금까지 600여년동안 화재가 발생한적이 한번도 없다. 물가에는 수상가옥이 즐비하고 맑은 강물에서 빨래하는 동네 여인들의 모습 또한 그림 그 자체이다. 거위가 물에서 노니는 소리와 잉어가 연못을 뛰어오르는 소리, 천짜는 소리, 닭이 울고 개가 짖어대는 소리들은 아름다운 교학악을 연주하는 듯 하다. (사진설명; 증충촌의 고요한 골목) 푸른 이끼가 가득한 돌길이 아늑하게 뻗어 있고 정교한 석각이 즐비한 건물을 그 어디서나 볼수 있으며 골목에서 뛰노는 꼬마와 천을 짜는 노인, 수놓이를...
판다번역 2011.10.04 추천 0 조회 1924
(사진설명: 동저도촌의 해초집)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여든 세번째는 말없는 해초의 집 동저도(東楮島, Dongchudao)촌이다. 부드러운 해초의 지붕이 모나는 돌집에 우아한 몸매를 만들어주면서 오랜 세월 이어져 온다. (사진설명: 아늑한 동저도촌) 오백여년전 명나라때 조성된 동저도촌은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어촌이다. 해초를 얹어 지은 돌집으로 유명한 동저도촌은 수려한 경치와 짙은 민속풍토, 수많은 민간전설, 풍부한 해산물자원, 유구한 음식문화도 보유하고 있다. 연꽃모양의 동저도촌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상대적으로 낮다. 동네의 남쪽에는 붉은 기와를 얹은 벽돌집들이 있고 북쪽에 해초를 얹은 돌집들이 모여 있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동저도촌에는 해초집에 사는 주민이 144가구이고 그들이 보유한 해초집은 650채에 달한다. 그 중 가장 오래된 해초집은 300여년전에 지은 것이고 백여년이상의 역사를 가진 해초집도 400여채에 달한다. (사진설명: 동저도촌의 해초집) 해초집들은 둥글거나 네모난 커다란 돌로 벽을 쌓았는데 그 자연스러운 무늬가 소박한 미를 자랑한다. 지붕에는 해초를 두텁게 올리고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기와나 시멘트로 해초를 지붕에 고정시켰다. 이런 해초집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백년이 지나도록 썩는 건자재가 없어 자자손손 편안하게 주거할수 있다. 썩지 않고 습기를 흡수하며 방수역할도 하는 이런 해초는 오염이 없는 원초적인 건자재라 할수 있다. (사진설명: 해초집의 지붕과 벽) 해초집의 자연스럽게 경사를 이룬 지붕에는 해초를 1m두께로 쌓아 돈후한 감을...
판다번역 2011.10.04 추천 0 조회 2150
(사진설명: 웅애소촌의 성문)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여든 두번째는 마지막 남은 명나라 성 웅애소(雄崖所, Xiongyasuo)촌이다. 동쪽과 북쪽으로 바다를 마주한 웅애소촌은 적갈색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고 해서 이름이 웅애소이다. (사진설명: 웅애소 성문) 웅애소 옛성은 1402년의 명(明)나라때 축조된, 명나라와 청(淸)나라 두 조대에 걸친 해양군사보루이다. 산동(山東, Shandong)의 몇몇 해상방어초소의 하나였던 웅애소는 1735년에 군사시설로서의 기능을 잃고나서 대부분 건물이 파손을 면치 못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웅애소 옛성의 유적으로는 흙으로 쌓고 외벽에 청색의 벽돌을 붙인 정방형의 성과 수차의 보수를 거치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누각을 떠인 성문이다. (사진설명: 웅애소 봉은문) 성문의 바같쪽에는 황제의 은혜를 받는다는 의미로 봉은(奉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안쪽에는 길한 운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영훈(迎薰)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성문안쪽의 계단을 따라 성문위의 문루(門樓)에 오를수 있다. 방 세 칸 너비의 문루는 양쪽에 별채를 거느리고 좁으면서도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심플한 처마로 웅장함을 나타낸다. (사진설명: 웅애소 서문) 웅애소성의 서문문루는 무너졌지만 문틀은 여전히 남아 있고 "진위(鎭威)"라는 두 글자를 새긴 문위의 현판도 여전하다. 웅애소의 남문에 서서 저 멀리 바라보면 맞은켠 산 정상위의 옥황묘(玉皇廟)가 한 눈에 보인다. 돌을 쌓아 지은 옥황묘에서 볼거리는 대들보가 없는 무량전(無樑殿)이다. 역시 명나라때 지은 이 건물은 웅애소촌의 안녕을 지키는 초소처럼...
판다번역 2011.10.04 추천 0 조회 1807
(사진설명: 미대소촌의 성)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여든 한번째는 성과 절이 함께 하는 동네 미대소(美垈召, Meidaizhao)촌이다. 17세기초 라마교 생불이 이 곳에서 불교를 전파하면서 오늘에 이른 미대소촌은 불교사와 건축사, 미술사를 잘 보여준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미대소촌) 400여년전의 명(明)나라때 조성된 미대소촌은 맑은 강물이 흐르는 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미대소촌의 건물은 중원지대 한(漢)족 건물 양식에 몽골족과 티베트족 건물의 특징을 접목해 "성과 절, 인간과 불이 함께"한다. 미대소는 원래 영각사(靈覺寺)로 불렀고 뒤에 수령사(壽靈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1567년 명나라때 이 곳에서 최초로 절을 지었고 그 뒤에 마이다리라고 하는 티베트 불교의 스님이 이 곳에서 불교를 전파했다고 해서 일명 마이다리묘(邁達里廟)라고도 한다. 미대소는 주변에 돌과 흙으로 정방형 모양의 성을 쌓고 성 네 귀퉁이에 밖으로 툭 튀어나가게 단을 만들고 그 위에 각루(角樓)를 지었다. 남쪽 성의 중앙에 문을 내고 문위에 성루(城樓)를 쌓았다. (사진설명: 미대소촌의 성문) 성문위에는 명나라때 돌 간판에 새긴 태화문(泰和門)이라는 글자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성안에는 순의왕(順義王)가문이 자자손손 살아오는 건물과 정원이 있고 현지집권자 아라단한의 부인이었던 삼낭자(三娘子)의 골회가 공양된 태후전(太後殿)이 있다. 경당(經堂)과 대웅보전, 나한당, 관음전 등 웅장한 절 건물들에는 불교법사에 사용되는 다양한 법기들이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다. 건물벽에는 불교의 스토리와 호법신을 비롯한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진설명:...
판다번역 2011.10.04 추천 0 조회 1919
(사진설명: 북방성촌의 성문)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여든 번째는 북방 보루의 동네 북방성(北方城, Beifangcheng)촌이다. 43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북방성촌은 사면이 막혀있는 어젯날 보루의 구도와 문화재, 건축유적 등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1576년에 조성된 북방성촌에는 명청(明淸)시기의 가옥과 무대건물, 절, 방앗간, 성문 등 많은 고건물유적들이 다양한 양식과 특이한 모양, 완정한 구도를 자랑한다. 북방성촌은 초원의 목민문화와 중원(中原)의 농경문화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건물은 대부분 성보(城堡)라고 하는 방어형의 건물형식인 성으로 되어 있다. 사면 성의 길이는 각각 200m이고 건물도 모나게 지음으로써 일명 모난 성이라는 의미로 방성(方城)으로도 불리운다. 성안에는 중앙에 난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6갈래의 골목이 대칭을 이룬다. (사진설명: 북방성촌의 재신묘) 거리의 양쪽에는 재물신을 모시는 재신묘(財神廟)와 마신묘(馬神廟), 삼각당(三覺堂), 진무묘(眞武廟)를 비롯해 고건물들이 즐비하고 성문앞에는 무대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최초에 작은 보루였던 북방성보의 모태는 오늘날 터만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작은 보루의 옆에 성을 쌓았고 그 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유지해온 북방성촌이다. 사람의 주거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물과 도로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북방성촌은 주요한 교통선상에 위치해 있다. 북방성촌을 경유하는 도로는 인근에서 가장 큰 절과도 연결되고 서역인과 몽골인, 중원사람들이 필히 거쳐가는 옛 길이기도 하다. 과거 북방성에는 남쪽에만 문을 냈고 따라서 성문만...
판다번역 2011.09.21 추천 0 조회 1794
(사진설명: 고요한 주가욕촌)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아홉 번째는 강북의 첫 동네 주가욕(朱家峪, Zhujiayu)촌이다. 산언덕에 비스듬히 들어앉은 주가욕촌에는 사당과 누각, 석교와 옛 거리, 절과 샘물 등 80여군데의 명소가 있다. (사진설명: 주가욕촌의 건물과 물길) 사면에 푸른 청산이 둘러서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주가욕촌에 들어서면 원초적인 자연과 유구한 역사의 옛스러움, 아늑한 고요를 느끼면서 인생의 뜻도 되새길수 있다. 주가욕촌은 원래 성각욕(城\角峪)으로 불리웠다가 후에는 부산욕(富山峪)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다가 명나라 개국황제와 동성인 주(朱)씨네가 입주하면서 주가욕으로 또 이름을 바꾸고 오늘까지 이른다. 주가욕촌에는 크고 작은 고건물 200여채, 다양한 모양의 석교 20여개, 우물 20여군데, 절 10여채가 있는 동시에 두 개의 석교, 두 갈래의 고도(古道), 문창각(文昌閣), 관제묘(關帝廟), 주씨사당 등을 비롯해 명소도 부지기수이다. 1721년에 판 성수영천(聖水零泉)은 성수묘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우물이다. 우물입구는 돌로 쌓았고 우물의 역사를 적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전한데 의하면 청나라때 가뭄이 들어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아주 영험해 우물을 파고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사진설명: 최초의 입체교 강희쌍교) 강희쌍교(康熙雙橋)라는 이름의 명소에는 두 개의 석교가 10m거리에 사이좋게 위치해 있다. 1670년에 축조한 동쪽의 석교와 1688년에 건설한 서쪽의 석교는 나란히 300여년의 나이를 먹었다. 상하 이층으로 된 이 석교는 석회석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청석을 무어 만들었음에도...
판다번역 2011.09.21 추천 0 조회 1910
(사진설명: 계명역촌의 성문)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여덟 번째는 세계 최초의 우체국 동네 계명역(鷄鳴驛, Jimingyi)촌이다. 계명역촌은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기능이 가장 잘 갖추어져 있으며 가장 완정하게 보존된 옛 역참으로써 중국의 우체국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사진설명: 계명역촌의 성과 계명산) 800여년전의 원(元)나라때 조성된 계명역촌은 1420년대의 명(明)나라때 이르러 베이징(北京, Beijing) 북쪽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명청시기 중국의 군사와 정치, 경제, 통신 등 제분야에 걸쳐 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기 때문에 역참 하나가 마을을 형성했고 "세계 최초의 우체국"이라는 미명을 가지게 되었다. 1472년에 계명역참에는 토성을 쌓았고 1570년에 벽돌로 바꾸었다. 네모난정방형 모양을 띤 역참의 성 둘레는 2330m, 성의 높이는 12m이며 성의 외벽에 벽돌을 쌓았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계명역촌 성문) 오늘날 서쪽 성벽이 한 구간 무너진 외 성 전반이 완정하게 보존되어 있다. 동쪽과 서쪽에는 성문을 하나씩 내고 "계명산역(鷄鳴山驛)"과 "기충투우(氣沖鬪牛)"라는 현판을 걸었다. 키 높은 성벽과 두터운 성문, 문위의 커다란 쇠못이 오늘도 드팀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1738년에 성을 보수하고 동쪽에 해자를 파서 역참으로 계속 사용하다가 1913년 당시의 북양(北洋)정부가 역참대신 우체국을 개설한다고 하면서 역참의 기능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진설명: 계명역촌과 계명산) 가로 세 갈래, 세로 두 갈래의 길이 계명역촌에 우물 정(井)자를 쓰면서 동네를 세 구역,...
판다번역 2011.09.21 추천 0 조회 2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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