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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사진설명: 편성촌의 뜰과 건물)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일곱 번째는 심산속의 신기한 산채 편성(偏城, Piancheng)촌이다. 이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편성촌은 삼면에 산이 둘러선 산 기슭의 옛 성이다. (사진설명: 아늑한 정원과 건물) 치우칠 편(偏)자에 재 성(城)자를 붙여 지은 편성이라는 동네 이름에는 유래가 있다. 일설에는 편성촌이 한쪽에 치우친 외 딴 곳에 있다고 해서 편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설에 의하면 이 동네가 성은 성인데 북과 남, 동쪽에만 성문이 있고 서쪽에 성문이 없기 때문에 완벽한 성이 아니라고 인정되며 따라서 이름이 편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세월의 흔적이 역역한 성문) 성에 성문 네 개를 둔 것이 아니라 세 개만 둔데는 오행팔괘(五行八卦)의 설때문이라고 한다. 물에 속하는 북쪽에서 나무가 나고, 나무로 불을 지펴 남쪽은 불을 가르키며, 동쪽은 나무에 속하기 때문에 나무와 나무가 서로 돕는데 서쪽은 금속을 대표하고 금속은 나무를 깎기 때문에 서쪽에 문을 두면 좋지 않다고 인정해서 서쪽에 문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성(城)이란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을 의미하고 편성촌의 유가채(劉家寨)는 한 가문의 주거지이기 때문에 성하고는 거리가 멀고 따라서 편성이라 했다는 것이다. 편성의 유래와 무관하게 유(劉)씨가문이 조성한 편성촌은 동네 주변에 청석을 쌓아 10m 높이의 성을 쌓고 동쪽과...
판다번역 2011.09.21 추천 0 조회 1903
(사진설명: 멀리서 본 영담촌)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여섯 번째는 붉은 돌의 보루 영담(英談, Yingtan)촌이다. 강물을 마주하고 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영담촌은 붉은 돌로 쌓아 푸른 녹음속에서 더 없이 눈에 띈다. (사진설명: 꼬불꼬불 위로 뻗은 길) 6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영담촌의 이름에 관해서는 재미나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천여년전 당(唐)나라때 봉기군이 이 곳에서 영웅간담회를 열었다고 해서 이름을 영담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산 언덕에 지은 영담촌인지라 이 마을의 거리는 산세를 따라 기복을 이루면서 동네 모든 건물을 연결시킨다. 따라서 주요 거리와 거리 양쪽의 골목은 갈 지(之)자 모양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다. (사진설명: 영담촌의 길과 물길과 건물) 영담촌에서 지세가 가장 낮은 곳에서 임의로 한 골목을 따라 갈 지자로 이리 저리 따라 올라가면 종당에는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이르게 된다. 돌을 깐 주요 거리의 바로 옆에는 물길이 항상 함께 한다. 동서향으로 뻗으면서 영담촌을 경유하는 이 물길은 산 언덕을 비스듬히 흘러내리면서 낙차를 형성하고 물길위에는 좁고 긴, 혹은 무지개 모양의 다리 18개가 운치를 돋군다. (사진설명: 붉은 돌로 지은 집) 영담촌에 들어서면 마치 돌의 세상에 들어선 듯 착각하게 된다. 돌집과 돌로 쌓은 움집, 돌다리, 돌길, 맷돌, 돌부엌 등 온갖 돌들이 소박하고 신비스러운...
판다번역 2011.09.21 추천 0 조회 2315
(사진설명: 멀리서 본 영담촌)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여섯 번째는 붉은 돌의 보루 영담(英談, Yingtan)촌이다. 강물을 마주하고 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영담촌은 붉은 돌로 쌓아 푸른 녹음속에서 더 없이 눈에 띈다. (사진설명: 꼬불꼬불 위로 뻗은 길) 6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영담촌의 이름에 관해서는 재미나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천여년전 당(唐)나라때 봉기군이 이 곳에서 영웅간담회를 열었다고 해서 이름을 영담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산 언덕에 지은 영담촌인지라 이 마을의 거리는 산세를 따라 기복을 이루면서 동네 모든 건물을 연결시킨다. 따라서 주요 거리와 거리 양쪽의 골목은 갈 지(之)자 모양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다. (사진설명: 영담촌의 길과 물길과 건물) 영담촌에서 지세가 가장 낮은 곳에서 임의로 한 골목을 따라 갈 지자로 이리 저리 따라 올라가면 종당에는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이르게 된다. 돌을 깐 주요 거리의 바로 옆에는 물길이 항상 함께 한다. 동서향으로 뻗으면서 영담촌을 경유하는 이 물길은 산 언덕을 비스듬히 흘러내리면서 낙차를 형성하고 물길위에는 좁고 긴, 혹은 무지개 모양의 다리 18개가 운치를 돋군다. (사진설명: 붉은 돌로 지은 집) 영담촌에 들어서면 마치 돌의 세상에 들어선 듯 착각하게 된다. 돌집과 돌로 쌓은 움집, 돌다리, 돌길, 맷돌, 돌부엌 등 온갖 돌들이 소박하고 신비스러운...
판다번역 2011.09.21 추천 0 조회 1970
(사진설명: 유리거촌 입구)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다섯 번째는 중국 유리의 고장 유리거(琉璃渠, Liuliqu)촌이다. 화려하고 밝은 색채의 유리제품을 가공하는 유리거촌의 오지굽는 가마는 지난 700여년동안 불을 끄지 않고 있다. (사진설명: 유리기와로 만든 벽화) 유리기와는 궁궐과 절에 사용된다. 유리거촌에서 굽는 유리기와는 "유리거가 없으면 자금성(紫禁城)의 금빛 찬란함이 없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뒤에 구룡산(九龍山)을 업고 영정하(永丁河)를 마주한 유리거촌은 료(遼)나라와 금(金)나라,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등 다섯 조대에 걸쳐 천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옛 마을이다. (사진설명: 유리거촌의 유리굽는 가마터) 따라서 유리거촌의 유리제품 공법도 천여년의 역사를 가진다. 원(元)나라때부터 이 곳에 당시 조정의 유리국을 세웠고 청(淸)나라때는 아예 유리공장을 이 곳에 옮겨오고 유리제품 가공에 필요한 물길을 파고 이름을 유리거촌이라 했다. 유리거촌에는 오늘날 베이징에서 유일하게 황색의 유리기와를 떠인 청나라때 육교와 서산대도(西山大道) 유적, 용왕묘, 무대건물, 삼교암(三敎庵), 백의암(白衣庵), 오도묘(五道廟), 노군당(老君堂), 산신묘(山神廟)를 비롯해 많은 전통건물과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유리거촌의 유리제품은 명청시기에는 황궁에만 납품되었고 해방후에는 인민대회당과 모주석기념당, 역사박물관, 조어대 국빈관, 베이징 서역 등 건물에 사용되었다. (사진설명: 유리로 만든 공예품) 유리거촌은 유리제품공법을 자자손손 이어가기 위해 학교에 유리제품 조제공법과정을 설립해 현지의 학생들이 어릴때부터 유리제품을 만드는 전 과정을 배우게 하고 있다. 또한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여년의...
판다번역 2011.09.14 추천 0 조회 2611
(사지설명: 우가촌의 돌집)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네 번째는 돌들의 우(于)씨동네 우가(于家, Yujia)촌이다. 우가촌에서는 돌로 된 누각, 돌로 쌓은 집, 돌을 깐 뜰, 돌로 만든 거리, 돌 다리, 돌기둥과 돌로 된 대들보, 돌문, 돌현판 등이 굳어진 음률처럼 건축문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사진설명: 우가촌 동구밖) 자연적으로 형성된 성과 같은 사면의 산에 안긴 우가촌은 동구밖에 이르러서야 동네가 보인다. 우가촌은 동쪽에 청량각(淸凉閣), 서쪽에 서두각(西頭閣), 남쪽에 관음각(觀音閣), 북쪽에 용천각(龍天閣)이라는 문 네 개를 두고 있다. 동네 어느 곳에서나 돌을 볼수 있는 우가촌은 1998년에 돌민속촌으로 명명받았다. 그로 인해 일명 석두촌(石頭村)으로도 불리우는 우가촌은 5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사진설명: 우가촌 우물) 우가촌은 명(明)나라때의 민족영웅인 우겸(于謙)의 후손들로 구성되어 있다. 1449년부터 1457년사이 명나라때 쿠테타를 일으킨 우겸이 살해되자 그의 후손들이 고향인 절강(浙江, Zhejiang)성을 떠나 북상해 하북(河北, Hebei)성산속에 이르러 터를 잡았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우가촌으로 발전해왔다. 이 곳에 터를 잡고 동네를 형성하던 초기 이 곳에는 물이 부족했고 따라서 엄격한 용수의 룰을 정했다. 청(淸)나라때 세운 비석에 의하면 우가촌에는 생활용수와 생산용수의 관리와 배분에 관한 규정이 세부적으로 되어 있다. (사진설명: 우가촌 뜰) 신을 공양하는 절과 문의 기능을 가진 누각, 노래와 춤을 공연하는 무대건물은 우가촌의 기본적인 건축구도이다. 심심산골에 터를 잡은 이...
판다번역 2011.09.09 추천 0 조회 2495
(사진설명:  영수촌의 아늑한 뜰)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세 번째는 베이징 근교의 선비 동네 영수(靈水, Lingshui)촌이다. 과거시험에 급제한 사람이 많고 최초의 대학교인 베이징 연경대학에 입학한 사람도 6명이나 되어 선비의 동네로 인정되는 영수촌에서는 얼룩진 바람벽과 반 남은 절의 담, 키 높은 고목에서도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던 영수촌 학도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설명: 영수촌의 고요한 골목) 베이징(北京, Beijing)에서 서쪽으로 78km 떨어진 묘봉산(妙峰山)의 서남쪽 기슭에 위치한 영수촌은 이천여년전의 한(漢)나라때 조성되어 천여년전의 료(遼)나라때 동네의 규모가 형성되면서 지금까지 명청(明淸)시기의 건물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마을에는 용왕묘와 문창각(文昌閣), 오도묘(五道廟), 천성성모묘(天仙聖母廟), 백의암(白衣庵), 괴성루(魁星樓), 승천암(勝泉庵), 영천선사(零泉禪寺) 등을 비롯해서 절도 많다. (사진설명: 옛 터의 고목) 이런 절이나 절터, 마을의 가옥들 사이에는 또한 키 높은 고목들이 줄지어서 유구한 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영수촌을 우아하고 질박하며 아늑한 동네로 만든다. 마을의 남쪽 산등성이에 올라 뭇산의 품속에 안겨 있는 영수촌을 내려다 보면 마치 커다란 거북이 누워있는 것 같다. 전설에 의하면 거북은 영을 가진 네 가지 동물 중 북쪽을 관리하며 길함과 장수를 대표한다고 한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영수촌) 영수촌의 세 갈래 골목과 사면이 막힌 크고 작은 사합원식 건물들이 머리를 남쪽에 두고 꼬리를 북쪽에 둔 이 거북잔등에 바둑판 같은 무늬를 그린다. 사람들은...
판다번역 2011.09.08 추천 0 조회 1793
(사진설명: 천저하촌의 밥짓는 연기)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두 번째는 대도시와 가까운 무릉도원 천저하(川底河, Chuandixia)촌이다. 뭇 산의 품속에 안긴 천저하촌에 들어서면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와 색바랜 창틀, 얼룩진 바람벽이 아름답고 아늑하며 유구한 시골경관을 펼친다. (사진설명: 천저하촌의 이름 찬) 1403년부터 1424년사이의 명(明)나라때 조성된 천저하촌 주민은 모두 한(韓)씨성이다. 베이징(北京, Beijing)에서 서쪽으로 90km를 가면 험준한 산발사이에 일명 고적산장(古蹟山庄)으로도 불리우는 아늑한 마을 천저하촌이 나타난다. 천저하촌은 원래 엄한과 재난을 피한다는 의미로 불을 때서 밥을 짓는다는뜻의 찬(爨)자를 붙여 찬저하촌으로 불리웠다. 산속에 은둔한 학자풍의 천저하촌은 무릉도원의 분위기를 다분히 풍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천저하촌) 마을에는 동서향으로 꼬불꼬불 뻗은 돌길을 따라 사면이 막힌 사합원(四合院)식 고건물 70여채가 자리잡고 있다. 산발을 따라 상하 이층으로 된 이런 건물들은 부채살모양으로 펼쳐지면서 질서있는 변화와 엄밀한 구도를 보여준다. 이 건물들은 안채와 안채 맞은쪽의 건물, 안채 양쪽의 건물로 구성되고 일부는 별채와 부엌을 따로 두기도 했다. 건물들 주변에는 문의 안팎에 세운 영벽(影壁)과 문루, 말고삐를 매는 기둥 전마장(拴馬桩), 말에 오르고 내릴때 사용하는 돌 상마석(上馬石) 등이 있다. (사진설명: 천저하촌의 문) 집집마다 문틀의 구조가 각자 다른데 문의 색갈과 문에 박혀 있는 못의 숫자, 그리고 문앞의 계단수를 보면 그 집 주인의 지위를...
판다번역 2011.09.07 추천 0 조회 2153
(사진설명: 아름다운 상감당촌)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한 번째는 아름다운 무릉도원 상감당(上甘棠, Shanggantang)촌이다. 소박한 민풍과 수려한 산수, 고풍스러운 건물의 상감당은 상업과 서원, 종교 등 문화특색도 가지고 있어 인문경관과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명소이다. (사진설명: 상감당촌의 건물과 산과 물) 주(周)씨의 선조가 당(唐)나라때 이 곳에 이르러 정착하면서 동네 이름을 감당이라 한 상감당은 지금으로부터 124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주씨는 고향인 산동(山東, Shandong)의 산열매를 생각하며 단 맛의 산열매라는 의미로 감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900여년전의 남송(南宋)때 지은 문창각(文昌閣)은 촌민들이 신선의 한 명인 문곡성군(文曲星君)에게 제사를 지내던 장소였다. 수차의 보수와 증축을 거쳐 양쪽에 용봉암(龍鳳庵)을 거느린 4층건물로 된 문창각은 오늘날 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설명: 문창각과 보영교) 문창각을 지나 사목하(謝沐河)위의 돌다리를 건너야 상감당에 들어설수 있다. 일명 도선교(度仙橋)라고 하는 보영교(步瀛橋)는 1126년에 축조되어 그 뒤에 수차의 보수를 거치면서 고역도(古驛道)의 중임을 떠메고 있다. 반달모양의 아치형 교각을 가진 이 다리는 영롱하면서도 운치있는 모양으로 높고 장엄해 보이는 건물 문창각과 조화를 이룬다. 전하는데 의하면 보영교에서 돌이 하나 떨어질때마다 상감당에서 한 사람이 벼슬길에 오른다고 한다. (사진설명: 거북이 모양의 귀산) 보영교 뒤쪽에 우뚝 솟은 328m의 돌산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앙산(昻山)이다. 산위에 숲이 무성한 앙산은 감당팔경의 한 명소이다. 그밖에 감당팔경의 다른 한 경관은 귀산(龜山)의...
판다번역 2011.09.06 추천 0 조회 2047
(사진설명: 멀리서 본 간암두촌)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일흔 번째는 호남 옛 가옥의 정수들이 모인 동네 간암두(干岩頭, Gan'antou)촌이다. 간암두촌에 들어서면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청산녹수속에서 하얀 벽체와 검정기와의 옛 건물들이 유난히 아름답다. (사진설명: 주가대원의 고건물) 날아갈듯 건듯 들린 처마를 떠인 명청(明淸)시기 고건물들이 우아하면서도 대범해 보이고 숙연하면서도 웅장한 기세로 장관을 이루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뒤에 산을 업고 물가를 마주한 간암두촌의 건물은 모두 북쪽을 바라본다. 간암두촌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건물은 정교한 조각예술과 유구한 역사문화, 짙은 민족적 특색을 자랑하는 주가대원(周家大院)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주가대원) 1450년부터 1456년사이의 명(明)나라때 짓기 시작한 주가대원은 1904년의 청(淸)나라때 완공되었다. 송나라때의 이학학자 주돈이(周敦颐)의 자손들이 명나라 중반에 이 곳에 이르러 연 26대에 걸쳐 600여년을 살아오고 있다고 해서 이름이 주가대원이다. 주가대원은 고대 건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풍수학적 사상을 잘 보여준다. 건물의 삼면에 산이 둘러서고 앞쪽은 전망이 트여 있으며 양쪽에 산봉이 첩첩하여 심히 장관이다. 주가대원의 앞쪽에서 두 갈래 강물이 모이고 강물위에는 작은 다리가 놓여져 있으며 다리의 난간에는 상이한 조각들이 정교하고 그 곁의 산위에는 도를 닦아 선인이 되었다는 전설속 주인공 하선고(何仙姑)의 생가가 있다. (사진설명: 주가대원의 옛 집) 웅장한 규모의 주가대원은 북두칠성의 위치에 따라 건물의 위치를 정했다. 옛 집과...
판다번역 2011.09.05 추천 0 조회 1835
(사진설명: 고의촌의 첩첩한 고건물) 경제의 발전과 함께 도농간 격차가 줄면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골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려한 경치와 고풍스러운 옛 건물, 풍부한 민속풍토를 가진 숨은 백여개의 시골로 출발한다. 중국의 유명시골 중 예순 아홉 번째는 주경야독문화의 동네 고의(高椅, Gaoyi)촌이다. 오늘날도 짚을 태워 취사하고 나뭇집에서 사는 고의촌에서는 도처에서 건강한 노인을 볼수 있다. 소박하고 원초적인 민풍을 유지하는 이 곳에서는 오늘날도 손님이 오면 산 노래를 부르고 문앞에서 손님맞이 차를 대접한다. 마을의 이곳저곳에서는 또한 원시적인 방법으로 대나무방석위에 곡식을 널어 건조시킨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고의촌) 옛날 부두였던 고의촌은 원래 이름이 도륜전(渡輪田)이었는데 삼면이 산이고 한 쪽이 물가인 동네의 모습이 손잡이가 달린 의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높은 의자라는 뜻으로 이름을 고의촌으로 바꾸었다. 촌민들은 대부분 천여년전의 남송(南宋)때 현지의 지방관리로 임명받은 양사원(楊思遠)의 자손이다. 자자손손 한 동네에서 살아가면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해온 고의촌은 "고민가 건축물의 활화석", "민속박물관", "주경야독문화의 대표", "강남의 첫 옛 동네"라는 많은 미명을 안고 있다. (사진설명: 아늑한 고의촌) 고의촌에는 현재 13080년부터 1881년까지 사이에 지은 명청시기 고건물 104채가 보존되어 있다. 이런 고건물들은 오통묘(五通廟)를 중심으로 매화꽃모양으로 분산되면서 노옥가(老屋街)와 감각(坎脚), 대옥항(大屋巷), 전단(田段), "상하채(上下寨)" 등 다섯개 동네를 형성한다. 다섯개의 매화꽃잎을 방불케 하는 이런 동네는 동네별로 다양한 시간대를 타나낸다. 서쪽의 노옥가는 명나라 초반때 지은 건물중심이고, 북쪽의 전단은 명나라 후반의 건물, 동쪽의 대옥항은 청나라 초반의 건물, 상하채는 청나라 후반의 건물들을 보존하고 있다. (사진설명: 고의촌의 골목)...
판다번역 2011.09.05 추천 0 조회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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