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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사진설명: 칠리평의 건물)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대별산속의 붉은 동네 칠리평(七里坪, Qiliping)은 중국 혁명근거지이고 홍군 제4군의 탄생지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세 명 장군의 고향이기도 하다. 구백여년전의 원(元)나라때에 동네가 형성된 칠리평은 줄곧 농산물 집산지였으며 명청(明淸)시기에 이르러서는 호북(湖北, Hubei)성 소재지 무한(武漢, Wuhan)에 맞먹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진설명: 장승가 입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위한 혁명시기 소비에트 군정기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칠리평 장승가(長勝街)는 수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청시기의 옛 거리이다. 고대 휘파(徽派) 건물풍격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이 곳에는 중국 혁명을 위해 기여를 한 많은 군사가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650m 길이의 거리에 광호문(光浩門)유적과 칠리평 공회(工會), 소비에트 은행, 홍군 식당, 경제공사, 중서약국, 홍군 지휘부, 혁명 재판소 등 많은 혁명유적들이 남아 있다. (사진설명: 칠리평의 거리와 건물) 고풍스러운 거리 양쪽에는 푸른 벽돌에 검은 기와를 떠인 건물들이 날아갈듯한 처마를 하고 있다. 나무문과 나무창을 가진 건물과 건물사이에는 정교한 조각이 즐비한 키 높은 봉화벽(封火壁)이 솟아 있다. 거리의 남쪽과 북쪽에는 성문이 솟아 그 사이의 좁은 청석길에 들어서면 마치 수천년을 살아온 지혜로운 노인의 품속에 안긴 듯 세속의 모든 번뇌를 잊게 된다. (사진설명: 대성사탑) 대성사탑(大聖寺塔)은 일명 쌍성탑(雙城塔)이라고도 한다. 벽돌로 쌓은 이 탑은 육각형에 13층으로 되어 있고 위로 올라가면서 폭이 점점 좁아지면서 조화를 이룬다. 층사이에는 지붕와 처마를...
판다번역 2011.04.14 추천 0 조회 1975
(사진설명: 멀리서 본 형자관)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세 성을 타고 앉은 동네 형자관(荊子關, Jingziguan)은 이름을 들으면 보라색의 꽃이 피는 박태기나무를 연상하게 하는데 사실 오늘날 형자관에서는 박태기나무를 볼수 없다. (사진설명: 형자관의 거리와 건물) 천여년전의 당(唐)나라때 형성되어 오륙백년전의 명청(明淸)시기에 번성기를 누린 형자관에는 옛날에 정말로 박태기나무가 무성했다고 한다. 단, 오늘날은 그 광경이 사라졌지만 뒤에 산을 업고 물을 낀 형자관이 예로부터 상업중심지와 군사요충지였음은 변하지 않았다. 번성기에 이 곳에는 대기업 3개와 업종협회 8개, 수송업체 10개, 상사 24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오늘날 형자관에는 명청시기의 고건물 700여채가 남아 있다. (사진설명: 형자관 고관문) 강가에 줄지은 수상가옥은 강남풍을 다분히 풍기고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산섬회관(山陝會館)과 평랑궁(平浪宮)은 찬란했던 어젯날을 보여주며 무성한 대나무숲속에 위치한 법해사(法海寺)는 신비감을 안겨준다. 벽돌과 돌로 쌓은 형자관 고관문(古關門)은 높이 7m, 너비 6m, 폭이 1m에 달한다. 아치형의 문위에는 형자관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고 그 문을 넘으면 형자관의 고건물들이 한 눈에 안겨온다. (사진설명: 형자관 청석길) 청석을 깐 2.5km길이의 형자관 옛 거리 양쪽에는 청나라때의 가옥 700여채가 줄지어 있다. 거리로 향한 쪽은 가게이고 그 뒤에 뜰을 둘러싸고 건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뜰은 대부분 두 세겹으로 깊숙하고 양쪽에 건물들이 대칭을 이루며 건물사이에는 화재를 방지하고 두 집사이를 갈라주는 높은 봉화벽(封火壁)이 첩첩하게 조화를...
판다번역 2011.04.14 추천 0 조회 2346
(사진설명: 사점의 고건물 삼섬회관)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이 세상 첫 가게의 동네 사점(赊店, Shedian)은 수로와 육로의 교통요충지로써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장사를 하면서 가게도 많이 생기고 그로 인해 많은 유적들이 지금까지 남아 내려오고 있다. (사진설명: 사점의 옛 거리) 반수(潘水)와 조수(趙水) 두 갈래 강물의 합수목에 위치한 사점을 남주(南駐)도로와 방조(方棗)도로가 경유해 사점은 오늘날도 명실공히 수륙교통의 요충지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수많은 영웅들이 천하를 다투던 서한(西漢)말엽에 서한의 황실 유수회(劉秀懷)가 한나라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크게 패하고 도주하는 중에 이 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패잔병을 이끈 유수회가 사점에 이르러 술집을 하나 발견하고 모두들 그 가게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나서 기백을 되찾았다. 기쁜 마음의 유수회가 가게문을 나와 보니 가게앞 주기에 유(劉)자가 적혀 있었다. 마침 자신과 같은 성씨가 적혀 있는 것을 본 유수회는 크게 기뻐하며 그 주기를 자신의 군기로 삼고 용감하게 싸워 끝내 한나라를 되찾고 황제로 되었다. (사진설명: 사점의 술) 황제로 된 유수회는 유씨가게의 공과 유씨가게의 주기를 외상으로 빌려온 것을 생각하고 그 가게에 사기점(赊旗店)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그 가게의 술은 사점노주(赊店老酒), 그 동네는 사점진(赊店鎭)이라 했다. 사점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엽차로드의 중계역이었고 그로 인해 요금을 받고 물건을 운송해주던 고대의 물류업체격인 표국(镖局)이 한 때 이 곳에서 이름을 날렸다. (사진설명: 광성표국) 중국...
판다번역 2011.04.11 추천 0 조회 1913
(사진설명: 신후의 거리)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사면에 산을 둔 도자기의 동네 신후(神垕, Shenhou)는 남산에서 나는 석탄과 서산에서 나는 유약, 동산에서 나는 고령토로 중국 도자기의 일종인 균자(鈞瓷)를 만든다. (사진설명: 산후의 경치) 오천여년의 도자기 역사를 자랑하는 신후는 균자문화의 발상지로써 도자기 문화에 의해 형성된 지역적 특징으로 "중국 균자의 고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찍 기원전 하상(夏商)시대때부터 신후에는 사람들이 주거하면서 농사를 짓고 도자기를 구웠다. 그 뒤 천여년전의 당(唐)나라때 균자(鈞瓷)가 만들어지면서 중국 북방의 5대 도자기 허브의 하나로 부상했다. (사진설명: 신후의 도자기 산업)  명청(明淸)시기에 신후의 도자기산업은 번성기를 누렸다. 그 때 이 곳에는 "신후산에 들어서니 7리에 달하는 거리와 도자기 가마 72개가 있고 온 하늘에 연기가 자욱하다"는 말로 흥성하는 신후의 도자기산업을 묘사했다. 7리에 달하는 거리가 바로 오늘날의 신후 옛거리이다. 동서남북에 네 개의 산채와 홍석교(紅石橋), 관야묘(關爺廟), 거리 2개로 구성된 옛 거리로는 초하(肖河)가 흐른다. (사진설명: 신후의 산채) 과거에 산적과 큰물을 막기 위한 방어용으로 지어진 산채건물은 큰 문과 키 높은 돌담, 포루를 가지고 있다. 산채마다 쑥을 바라보다는 의미의 "망호(望蒿)", 하늘의 보우를 받다는 의미의 "천보(天保)" 등 우아한 이름을 지어놓았다. 또한 산채의 이름을 청석에 새겨 산채의 문위에 높이 걸고 산채마다 그 산채만의 특유한 건물과 지역특색이 다분한 가옥, 그리고 골목들이 자리 잡고 있다....
판다번역 2011.04.08 추천 0 조회 2785
(사진설명: 고형의 황하유람구)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세 가지 보배의 동네 고형(古滎, Guxing)은 기원전 6,7세기에 벌써 정(鄭)나라가 성을 쌓고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만든 유구한 역사의 동네이다. (사진설명: 고형의 서산유적) 1983년에 발견한 서산(西山)유적은 지금으로부터 5300-4800년전의 유적이다. 문화재의 시대별로 세 단계로 나뉘는 서산유적의 첫번째는 유적과 문화재가 상대적으로 적은 후강(後崗)문화시기이고 두번째는 유적이 많은 앙소(仰韶)문화시기이며 세번째는 앙소문화 말기이다. 그 중 특기할바는 흙으로 지은 건물과 토성중심의 앙소문화 말기유적이 중국 고대 문명의 기원과 도시발전사를 연구하는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사진설명: 형양고성의 한 구간) 기원전에 쌓은 네모난 성 형양고성(滎陽故城)은 아직도 모양이 남아 있다. 이 성은 남북길이가 2,200m, 동서너비가 1,500m에 달하고 높이는 20m, 상단 폭은 10m, 하단 폭은 30m에 달한다. 고형진 제철유적은 이천여년전 한(漢)나라때의 제철소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내화토로 쌓은 타원형의 키 높은 용광로와 벽체, 가공틀 등 제철관련 기구들을 볼수 있다. (사진설명: 제철소 유적) 그 중 1호 용광로는 한나라때 최대의 용광로로써 높이가 5,6m에 달한다. 용광로 주변에서는 생산공구 제조의 증거물로 다양한 주조 금형과 철기를 발견했다. 748년에 지은 기공묘(紀公廟)는 삼국시기 유방(劉邦)의 장군 기신(紀信)을 위한 절이다. 유방이 항우(項羽)에게 포위되었을때 기신이 유방으로 변장해 항우를 유인했고 그 사이에 유방이 포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사진설명: 기공묘의 비석) 뒤에 진상을 알게 된 항우가...
판다번역 2011.04.08 추천 0 조회 2211
(사진설명: 아름다운 주선)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목판세화의 고장 주선(朱仙, Zhuxian)은 중국 고대의 애국장령 악비(岳飛)가 첩보를 올린 유구한 곳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소박함과 웅장함을 자랑하면서 내외 관광객을 맞이한다. (사진설명: 주선의 관제묘) 기원전 이백여년때의 전국(戰國)시기 주선부근의 선인장(仙人庄)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주해(朱亥)가 싸움에서 큰 공을 수차 세웠고 그로 인해 현지 사람들은 주해를 주선(朱仙)으로 불렀으며 동네이름도 주선으로 고쳐 불렀다. 그 뒤 천여년전의 당송(唐宋)시기에 이르러 주선은 수륙교통의 요충지와 잡화의 집산지로 부상했으며 오륙백년전의 명청(明淸)시기에는 경덕진(景德鎭)과 불산진(佛山鎭), 한구진(漢口鎭)과 함께 중국 4대 명동네로 부상했다. (사진설명: 주선의 악비묘) 오랜 세월동안 상업도시와 유명한 전쟁터였던 주선에는 영웅과 연관되는 명소도 적지 않다. 주선에서 첩보를 올린 악비를 기리기 위해 1478년에 세운 악비묘(岳飛廟)는 웅장한 규모로 탕음(湯陰), 무창(武昌), 항주(杭州)의 악비묘와 함께 중국 4대 악비묘로 인정된다. (사진설명: 악비묘의 악비동상) 악비묘는 산문(山門)과 조벽(照壁), 뜰에 무릎을 꿇은 다섯 간신의 동상, 정전(正殿)의 악비동상, 악비수하의 네 장군 동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원에는 악비 부부의 조각상이 있고 별채에는 악비의 아들과 며느리의 조각상, 그리고 다양한 비석들이 있다. 옛날 주선에는 절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하늘에 있는 신선이라면 거의 모두가 주선에서 자신의 절을 찾을수 있었고 그로 인해 72개의 절을 가진 주선은 신선이 모인 동네라는 의미로 취선진(聚仙鎭)으로도 불리웠다. (사진설명: 청신사 산문) 그...
판다번역 2011.04.08 추천 0 조회 2090
(사진설명: 우라가의 가옥)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만(滿, Man)족의 발상지 우라가(烏拉街, Wulajie)는 우라국의 도읍이었다. 그로 인해 우라가는 길림(吉林, Jilin)성 제이의 도시 길림시에 비해서도 더 높은 지위를 확보하면서 "큰 우라가, 작은 길림시", "우라가 먼저 있었고 길림이 그 뒤에 형성되었다"는 설을 만든다. (사진설명: 우라가의 뜰) 길림시와 약 30km 떨어진 우라가는 송화강(松花江) 상류에 위치해 있다. 남쪽으로 용담산(龍潭山)을 마주하고 북쪽으로 봉황각(鳳凰閣)을 끼며 서쪽으로 송화강의 손을 잡고 동쪽으로 장백산(長白山) 지맥에 기댄 우라가는 좋은 풍수를 자랑한다. 만족어인 우라는 강가라는 의미이다. 사오백년전의 명(明)조때에 소수민족관리를 위해 이 곳에 우라위(衛)를 두었다. 그 뒤에 우라의 여진족들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부근의 여진족동네를 합쳐 우라국을 설립하고 우라에 도읍을 정했다. (사진설명: 우라가의 성터) 건주(建州)의 여진족 두령 누르하치가 수차 우라국과 싸우다가 1613년에 우라국을 멸하고 우라에서 여진족의 힘을 키워 남진해 천하를 얻고 청(淸)나라를 세웠다. 그 때문에 청나라 순치(順治)황제는 베이징(北京)에 청나라의 도읍을 정한 뒤 우라가를 청나라 발원의 성지로 정했다. 그로부터 장백산 기슭, 송화강가의 우라가는 오늘날까지 장엄함과 신비함을 보여준다.   (사진설명: 우라가의 괴부) 절 8개와 사당 4개, 저택 3채, 거리 1개 등 유구한 역사의 고건물을 보유했던 우라가에는 오늘날 괴부(魁府)와 살부(薩府), 백화점장대(白花点將台) 등 유적만 남아 있다. 뜰 두 개를 가진 사합원(四合院)식 건물인 괴부는 완정하게 보존된 청조의 건물이고...
판다번역 2011.04.05 추천 0 조회 2074
(사진설명: 예허의 건물)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청조 황후들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예허(葉赫, Yehe)는 사면에 푸른 산이 둘러서고 맑은 호수가 자리잡은 수려한 동네이다. 청조 개국황제 누르하치의 부인과 청조말의 자희(慈禧)태후가 이 곳에서 태어났다. (사진설명: 고요한 예허) 예허란 만족어로써 황제가 공신에게 하사한 패물을 뜻한다. 푸른 산 깊은 골을 흐르는 예허하가 동네를 관통하고 지상과 지하에는 많은 고대 문화유적들이 남아 있다. 2008년 이 곳에서 기원전 이백여년때 춘추전국(春秋戰國)시기의 청동기유적과 고총유적을 발견했다. 이로부터 예허의 역사는 삼천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진설명: 예허의 성과 해자와 누각) 예허나라명소는 옛성 문화구역과 전산호(轉山湖) 풍경명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고건물을 모방해 전산호 동쪽 기슭에 조성한 옛성은 웅장한 기세와 정교한 조각, 특이한 만족의 문화특색을 자랑한다. 옛성에는 나무와 흙, 돌로 쌓은 세 겹의 성이 있고 성밖에는 해자가 있다. 높은 곳에 올라서서 옛성을 바라보면 성밖에는 넓은 벌이 펼쳐지고 성안에는 고풍스러운 팔각루(八角樓)가 웅장함을 자랑한다. (사진설명: 예허성문) 청조의 흔적을 보여주는 완정하게 보존된 보루와 건물 중 특히 장군이 전투에 나갈 장수를 점찍는 점장대(點將台)와 연대가 눈에 띄고 높이 솟은 깃대와 귀맛좋은 방울소리, 신비한 샤먼이 짙은 민족적 색채를 자랑한다. 옛성 문화구역에는 성터유적과 고역참, 가람사(伽藍寺), 낭랑묘(娘娘廟), 충왕묘(蟲王廟) 등 문화유적들이 있다. 아늑한 산 허리에 자리잡은 티베트 불교의 절인 가람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에서는 향불이 끊기지 않고...
판다번역 2011.04.04 추천 1 조회 1919
(사진설명: 선경같은 영능)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만족의 첫 동네 영능(永陵, Yongling)은 청(淸)조의 발상지이고 만족의 고향이며 만족이 중국을 통일하기에 앞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의 서쪽 관서(關西)에 세운 세 능 중 첫번째이다. (사진설명: 영능의 패방)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정한 체계를 보존한 제왕의 묘지 영능은 청조를 세운 만족의 창업사를 읽고 세월의 풍상고초를 느낄수 있는 동네이다. 청태조(淸太祖)인 누르하치의 원조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해 증조 할아버지, 조부, 부친, 백부, 숙부에 이르기까지 청조의 거의 모든 조상들이 묻혀 있는 영능은 청조의 조상무덤군이라 할수 있다. 명(明)조때의 1598년에 지은 영능은 원래 이름을 경능(京陵)이라 했다가 청조때의 1659년에 이름을 영능으로 바꾸었다. 중국 고대 건물의 전통과 만족의 예술풍격을 보여주는 영능은 주변에 담과 전원(前院), 방성(方城), 보성(寶城) 등을 거느리고 있다. (사진설명: 영능의 전원) 영능의 남쪽에 위치한 전원은 중앙에 붉은 문을 두고 방 세칸을 가진, 노오란 유리기와를 떠인 건물이다. 뜰에는 청조를 세운 만족 네 황제의 공적을 기린 비석 네 개가 각자의 정자안에 있다. 가문을 일으켜 국가를 세웠다는 승가개국(承家開國) 등 송가가 만족어와 몽골어, 한문 세 가지 언어로 비문으로 새겨져 있고 비석 정자의 주변에는 다양한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다. (사진설명: 영능의 계운문) 비석의 북쪽에 네모난 성 방성이 있다. 남쪽 성의 중앙에 계운문(啓云門)이 있고 문틀에는 구슬을 가지고...
판다번역 2011.04.04 추천 0 조회 1997
(사진설명: 우장의 관제묘와 적토마) 96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외에 이름난 관광지나 관광도시는 물론이고 산과 들과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마찬가지로 비경이다. 관동의 첫 항만동네 우장(牛庄, Niuzhuang)은 고소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우장호떡과 유구한 역사, 새로운 관광명소로 내외 관광객의 발길을 끄는 옛동네이다. 사통팔달한 철도와 도로가 경유하고 물산이 풍부한 우장은 예로부터 경제, 문화의 허브역할을 해오고 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에 동네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로 우장의 동남쪽 귀퉁이에 철소를 묻었다고 해서 이름이 우장이라고 한다. (사진설명: 오늘날의 우장) 일찍 칠팔백년전의 명(明)조때 벌써 우장에 역참이 세워졌고 1623년에 성을 쌓았다. 그로 인해 오늘날 우장에는 동쪽에 덕승문(德勝門), 서쪽에 외양문(外攘門), 북쪽에 복승문(福勝門)이 남아 있다. 단, 성은 청조말에 다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다. 중국에서 관동(關東)이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의 동쪽지역을 말한다. 오늘날 우장에서 항만은 찾아볼수 없지만 태자하(太子河)를 낀 우장은 옛날 번화한 항만을 낀 관동의 첫 항만동네였다. (사진설명: 우장의 성당) 유구한 역사와 앞서가는 경제로 인해 우장은 예로부터 태평교에 비낀 저녁놀의 태평석조(太平夕照)와 성당의 경관을 보여주는 일주경천(一柱擎天), 이슬람사원의 경치를 보여주는 신루신원(神樓新月), 절의 경치를 보여주는 자기동래(紫氣東來), 마신묘(馬神廟)의 글 읽는 소리를 의미하는 고괴야종(古槐夜鐘), 은은한 회관의 조벽을 보여주는 해운용상(海韻龍祥), 번화한 항만을 보여주는 하구혼아(河口昏鴉), 갑오(甲午)전쟁터를 보여주는 석방정혼(石坊精魂)을 우장팔경으로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장팔경은 세월속에 사라지고 태평교만 남아 있고 성당과 이슬람사원은 최근에 신축한 것이며 다른 경관은 터에 비석을 세워 어젯날의 경관을...
판다번역 2011.03.30 추천 0 조회 2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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