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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원명원: 사라져간 정원

작성자
판다번역
작성일
2014-02-12 15:17
조회
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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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원명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두번째인 원명원(圓明園)은 사라져간 최고의 정원이다. 고도 베이징(北京)의 서북쪽에 최고의 풍수를 자랑하는 산수가 있어 예로부터 황실은 이 곳에 정원을 마련했다.

청(淸)을 세운 만족이 1680년 베이징에 입성해서 기마와 활쏘기를 잊지 않은 만족의 귀족들이 이 곳에 육속 황실정원을 조성했다. 그들은 황궁인 자금성(紫禁城)을 나와 북쪽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가서 고향의 기예를 닦았던 것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원명원)

옥천산(玉泉山)의 징청원(澄淸園)으로부터 시작해 그 뒤로 장장 180여년동안 만수산(萬壽山)과 옥천산, 향산(香山) 세 산에 창춘원(暢春園)과 원명원, 후에 정명원(靜明園)으로 개명된 징청원, 청의원(淸漪園), 정이원(靜宜園) 등 다섯 정원이 조성되었다.

청나라 전반에 걸쳐 황실 정원을 조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해본적 없고 정원을 조성하는 공사가 끊이지 않아 도성의 서산기슭, 만천하(萬泉河)강가에 엄청난 규모의 정원이 형성되게 되었다.


(사진설명: 원명원 유적지의 무너진 기둥)

그 중 원명원은 중국 고전원림의 모든 아름다움을 한 몸에 모으고 서양건축물의 정수를 섭취하였으며 정교하고 귀중한 보물, 고전작품과 서예작품을 대량 소장해 정원중의 정원으로 인정되었다.

원명원의 육지건물규모는 자금성과 맞먹고 수면면적은 이화원(颐和園)의 크기이다. 1707년 청의 강희(康熙)제때에 시작되어 1860년의 함풍(咸豊)제에 이르기까지 원명원은 장장 150여년 동안 축조를 계속했다.


(사진설명: 원명원 일각)

따라서 "원명원 정원 하나가 청나라 사서의 반"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대궐과 정원, 유럽풍의 바로크 건물을 갖춘 원명원은 가든과 궁정 두 가지 기능을 다 갖추었다.

옹정(雍正)제때부터 청의 황제들이 이 정원에 머물면서 원명원은 일반 황실정원으로부터 별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원명원은 가장 화려한 장소였고 보물들이 가장 많은 곳이었으며 정치의 중심지였다.


(사진설명: 원명원 일각)

옹정제는 이 원명원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했다. 옹정제의 뒤를 따른 청의 다른 황제들도 가장 많은 시간을 이 원명원에서 보내면서 이 곳에서 어지를 내려 황궁 자금성이 오히려 실질적인 용도를 잃을 정도였고 큰 행사를 치를때마다 자금성으로 돌아가둔 했다.

그런데 원명원이 바로 이렇게 경치도 좋고 시설도 고급스러우며 당시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한 최고의 장소로 부상했기 때문에 소각이라는 재난을 당하게 되었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복원한 원명원)

산과 물속에 자리잡은 원명원에는 145곳의 경관이 조성되고 각자 다양한 특색을 자랑하는 건물군락은 100여곳이나 되며 볼거리와 정원은 숫자를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원명원 부지의 반을 차지하는 수면은 크고 작은 호수와 그 호수를 연결하는 물길로 구성되어 완정한 시스템을 형성했다. 많은 경관들이 물가에 위치해 물을 특색으로 한다.


(사진설명: 서양식 건물의 석각)

새로운 것을 좋아하던 청의 황제가 정원에 중국풍의 건물은 물론이고 참신한 서양식 건물도 도입했다. 가장 대표적인 서양식 건물은 분수를 둘러싸고 지은 세 채의 건물이다.

분수를 둘러싼 "대수법(大水法)"과 "관수법(觀水法)", "원영관(遠瀛觀)"외에도 해안당(海晏堂)과 해기취(諧奇趣), 미궁과 같은 서양풍의 누각도 운치를 자랑했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복원한 원명원 서양식 건물)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일찍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중국의 원명원이 서양예술과 동양예술의 대표라고 하면서 전자는 이념적인 예술을 보여주고 후자는 몽환적인 예술을 보여준다고 했다.

빅트로 위고는 "원명원은 유일무이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몽환예술의 모범이기도 하다. 만약 몽환에 모범이 있다면"라는 말로 원명원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사진설명: 원명원 유적지의 설경)

하지만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에 불을 질렀고 이어 1900년에 8개국 연합군이 재차 베이징을 공략하고 원명원에 불을 질러 원명원은 더는 재생이 불가능한 폐허로 되었다.

1983년 원명원은 유적지 공원으로 되어 산과 물은 어느 정도 복원되어 봄에는 봄놀이, 여름에는 연꽃제, 가을에는 국화제, 겨울에는 눈놀이 등 행사를 마련한다.


(사진설명: 원명원 유적지의 여름)

설명:

원명원을 보는데 대부분 기춘원(綺春園) 궁으로 진입해서 석잔교(石殘橋), 봉린주(鳳麟洲) 유적, 삼원(三園) 접경처, 함경당(含經堂)유적, 사자림(獅子林), 서양루(西洋樓), 복해동안(福海東岸)을 거쳐 삼원 접경처로 돌아와 기춘원으로 정원을 나온다.

가이드가 없을 경우에는 사전에 원명원에 관한 공부를 하는 편이 좋다. 그러지 않을 경우 넓은 원명원의 옛 터에 서면 어디가 어딘지 전혀 갈피를 잡을수 없게 된다.


(사진설명: 원명원 전시관)

장춘원(長春園)의 동북쪽에 원명원전시관이 조성되어 원명원의 조성과 소각, 복원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무료 입장이 가능하며 30분에 한 번씩 담당자가 해설을 하기도 한다.

원명원 유적지 공원은 부지가 아주 넓으므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보는 것이 좋다. 날이 어두우면 홀로 공원에 남지 않도록 유의하고 겨울에는 얼음이 잘 얼지 않을수도 있음을 명심한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원명원)

위치: 베이징(北京, Beijing)시 해전구(海淀, Haidian)구

교통: 베이징 도심 천안문(天安門)남쪽의 전문(前門), 베이징 서역, 서직문(西直門) 등지에서 버스를 이용하거나 지하철을 사용한다.


출처: 중국국제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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