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info@pandatranslation.com | 조달등록업체 | 여성기업 | 수출바우처수행기관 | 성실납세업체 | ISO인증
관광지
(사진설명: 아름다운 원상도 유적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여덟번째인 원상도(元上都)유적지는 초원에 위치한 몽골제국의 여름수도였다. 원(元)나라의 두 도읍 중 하나인 원상도는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접목을 보여준다. 원상도는 폐기된지 수백년이 지났지만 어젯날의 도시구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원나라의 또 하나의 도읍은 당시 대도(大都)로 부른 오늘날의 베이징(北京)임은 많은 사람들이 다 안다. (사진설명: 베이징의 대도 유적지) 명청(明淸) 두 조대에 걸쳐 조성된 웅장한 도시 베이징성이 바로 원대도의 남쪽에 터를 잡았다. 베이징성의 구도가 원대도를 토대로 했을 뿐만 아니라 골목도 대도를 본땄다. 엄밀한 구도를 자랑하던 대도시 원대도는 벌써 사라지고 그 터에 새로운 도시가 들어섰다. 명조 초반에 폐기된 원대도의 북쪽 성곽과 해자가 남아 오늘날 원대도 성곽유적지 공원으로 개발되었다. (사진설명: 원상도 유적지 일각)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이런 글을 남겼다. "대리석으로 지은 궁궐이 심이 아름답고 건물내부에는 모두 금박칠을 했으며 새와 짐승과 꽃나무를 첩첩하게 그렸다. 기교의 정교함과 기술의 극치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었다". 이는 마르코 폴로가 원상도에서 원조의 개국황제 후빌라이 칸을 만난데 대한 묘사이다. 원상도가 어디에 있는지 머나만 서양인들은 알지도 못한다. 심지어 중국인들도 원상도가 어디 있냐고 하면 한참 생각해본다. (사진설명: 초원과 원상도 유적지) 초원은 여름이 가장 아름답다. 흐드러진 들꽃이 푸른 초원을 점점이 수놓고 푸른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꽃처럼 하늘을 수놓는다. 과거 몽골족들은 바로 이렇게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출발해 말을 타고 아시아와 유럽을 휩쓸고 거대한 몽골제국을 세웠던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514
 (사진설명: 아름다운 삼성퇴 유적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일곱번째인 삼성퇴(三星堆)유적지는 상상을 뛰어넘는 청동기 시대를 잘 보여준다. 역사를 전혀 모르는 문외한도 삼성퇴의 문화재에 깊이 매료된다. 꽃피는 봄날 사천(四川)성 소재지 성도(成都)에서 삼성퇴행 버스를 타면 창밖으로 싱그러운 시골냄새가 풍겨온다. 찬란한 햇빛이 도로 양쪽에 펼쳐진 노오란 유채꽃을 비추어 눈이 부시다. (사진설명: 봄날의 벌과 강물) 버스가 광한(廣漢)시를 지나면 압자하(鴨子河)강이 수려하게 펼쳐지고 강가에서 유유히 노니는 오리떼들이 오리의 강물이라는 압자하의 이름을 한 번 듣는 순간 기억하게 한다. 높게 쌓은 언덕의 나무그늘아래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차를 나누며 봄날의 햇빛을 즐긴다. 그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노라면 오천년전 삼성퇴의 사람들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느닷없이 머리에 떠오른다. (사진설명: 삼성퇴 박물관) 그 순간 광한시 서쪽 교외 압자하강가에 위치한 삼성퇴 유적지가 마치 그 물음에 답이라도 하는 듯 눈앞에 나타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상고시대의 사천은 환경이 열악하고 교통이 불편해 앞서가는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인정된다. 오죽하면 당(唐)조의 시인 이태백은 "촉으로 가는 길의 어려움은 하늘로 오르기보다도 더하여라"는 시를 썼겠는가. 하지만 삼성퇴유적지의 발견은 그런 생각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사진설명: 삼성퇴 박물관 일각) 중국의 문명이 황하(黃河)강 기슭에서 발원했다고 해서 황하를 중국의 젖줄이라고 했는데 장강(長江)기슭에서도 반만년 역사의 문명이 형성되었으니 장강 역시 황하강 못지 않은 젖줄인 것이다. 오천년전 사천분지에 살던 삼성퇴인들이 고도로 발달된 장강의 문명을 창조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기술이 바로 청동기 주조기술이다. (사진설명: 삼성퇴 박물관 일각) 삼성퇴...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879
(사진설명: 아름다운 낙양성유적지 공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여섯번째인 낙양성(洛陽城)유적지는 중국 최초의 왕도이다. 중국 8대 고도인 낙양에는 선후로 천여년에 걸친 10여개 왕조가 도읍을 정했다. 천여년에 걸쳐 10여개 조대가 낙양에 도읍을 정했다고는 하지만 확실하게 몇개 조대인지에 관해서는 정론이 없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구조고도(九朝古都)라 하고 공식적으로는 13개 조대의 도읍이라고 하며 현지인들은 13개 조대의 도읍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사진설명: 이리두 유적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그보다 더 많은 조대가 낙양에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어찌했든 낙양이 중국 최초의 도읍이고 이 곳에 도읍을 정한 조대가 가장 많으며 도읍사도 가장 길다는데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한다. 낙양의 도성은 사천여년전의 하(夏)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때 전설속에만 존재했던 하나라는 언사(偃師) 이리두(二里頭\) 유적지의 발견으로 인해 그 존재가 증명되었다. (사진설명: 언사상성 유적지) 이리두 유적지에서 많은 궁궐유적들이 발견되어 이 곳이 하나라의 도읍 짐심(斟鄩)임이 밝혀졌다. 이는 중국에서 고고학적으로 지금까지 발견한 최초의 도읍유적지이다. 하가 멸망한 후 상탕(尙湯)이 하나라 도읍의 옆에 서호(西毫)를 건설했는데 바로 오늘날의 낙양근교의 언사상성(偃師商城) 유적지이다. 그 뒤에야 비로소 정주(鄭州)와 안양(安陽) 등지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설명: 주왕성 유적지 일각) 서주(西周)에 이르러 오늘날 낙양근교인 낙읍(洛邑)으로 불리운 성주성(成周城)이 도읍은 아니지만 그 위상이 당시의 도읍이었던 호경(鎬京), 오늘날의 서안(西安)근교 버금으로 갔다. 주평왕(周平王)이 도읍을 낙양으로 옮긴후 낙양은 동주(東周)의 유일한 도읍으로 장장 오백년을 지속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모란꽃을 구경하기 위해 낙양에 밀려드는 관광객들은 모란이 이천여년전 동주의 왕성(王城) 유적지에 피어있음을 유의하지 못한다. 근년에 이...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3288
(사진설명: 아름다운 주구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다섯번째인 주구점(周口店)은 베이징 원인유적지로 인류의 요람이다. 인류가 태어난 이 곳에서는 상고시대의 세월을 피부로 느낄수 있다. 베이징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59km 떨어진 주구점은 원래 이름도 없는 작은 동네였다. 오랜 세월동안 이 곳에서는 용골이 많이 나서 산지가 용골산(龍骨山)으로 명명되었다. (사진설명; 약재로 사용된 용골) 사실 용골은 고대 옛날 큰 포유동물의 뼈가 화석화된 것이다. 그것을 안 스웨덴 지질학자 안데르손이 이 동네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1921년 안데르손 등 외국인 3명이 이 곳에 나타나 발굴을 시작했다. 그 뒤에 카나다 해부학자가 동참하고 미국 록펠러 기금이 후원하고 중국 지질조사소와 의대가 협력해 인류의 뿌리를 찾기 위한 고고학발굴이 주구점에서 개시되었다. (사진설명: 베이징 원인 두개골 화석) 1928년 베이징 지질학부를 졸업한 배문중(裵文中)이 이 곳에 이르러 발굴에 참가했고 바로 20대의 이 청년이 첫 두개골화석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또 다른 두개골 화석 2점과 대량의 다른 화석이 발굴되면서 온 세상이 주구점을 알게 되었다. 주구점에서 출토된 두개골 화석은 도합 5점이고 완정하지 못한 두골화석은 9점에 달하며 그밖에 면골화석이나 하악골화석, 치아 화석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사진설명: 베이징원인의 조각) 이런 화석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는 완정한 고대인류 군체를 대표하는 남녀노소 40여명 뼈의 화석임이 밝혀졌다. 넓지 않은 땅에서 이렇게 많은 화석이 출토되기는 처음이었다. 베이징인으로 명명된 이 원인은 인류의 역사를 십만년으로부터 오십만년으로 앞당겼으며 인류는 원숭이로부터 진화했음을 증명한 동시에 인류초기의 모양을 이해하는데 많은 흔적을 남겼다. (사진설명: 주구점...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288
(사진설명: 아름다운 고창고성)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네번째인 고창고성(高昌故城)은 번화한 고대로마를 방불케 하는 대도시의 폐허이다. 서역 최대의 옛 도시 유적인 고창은 그 만의 경관으로 웅장함을 자랑한다. 1900년대 초반에 제정 러시아의 한 여행객은 고창을 보고나서 그 웅장함에 매료되어 한참만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이는 고대 로마를 방불케 하는 폐허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고창고성) 불타는 산 화염산(火焰山)의 남쪽, 포도의 도시 투루판(吐魯番)의 동쪽에 위치한 고창고성은 고창왕국의 도읍이었다. 1세기에 고창왕국이 건국되어 선후로 여섯 임금이 이 곳에 도읍을 두었다. 640년 당(唐)이 고창을 멸하고 서주(西州)를 세운 뒤에도 소재지를 고창에 설립했다. 원(元)조 후반에 전란으로 인해 피해를 많이 입은 뒤로부터 점차 몰락의 길을 걸어 명(明)나라때부터 정치중심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투루판에 넘겨주게 되었다. (사진설명: 고창고성의 당승 강경대) 역사상 고창은 서역 최대의 국제도시이고 종교중심지였으며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인쇄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고창이 몰락된 후 대부분 건물이 파괴되어 완정하게 보존된 유물이 거의 없다. 그 중 고창의 서북쪽에 위치한 절은 당조 현장법사가 불경을 강의하던 곳으로 "당승강경대(唐僧講經台)"가 유난히 눈에 띈다. 궁궐유적인 가한보(可汗堡)는 고창의 왕궁으로 추측된다. (사진설명: 고창고성의 성터) 고창은 불규칙적인 사각형 모양을 하는데 둘레가 5km이고 구도는 당의 도읍이었던 장안(長安)을 본땄다. 외성의 성터는 윤곽이 뚜렷하고 성문까지 보존되어 있다. 내성은 외성의 중앙과 궁성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서쪽과 남쪽의 성곽은 대부분 보존되고 동쪽에는 토담만이 남아 있다. 성문의 유적은 전혀 보존되지 못한 내성의 둘레는 3km 정도이다. (사진설명: 고창고성의 일각) 궁성은...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1777
(사진설명: 아름다운 구거유적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세번째인 구거(古格)유적지는 신비하게 사라진 문명의 땅이다. 찬란한 구거문명과 십만여명에 달하는 구거인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무너진 옛터만이 남아 티베트의 많은 비밀 중 한 가지를 품고 있다. 구거왕국은 티베트를 통일한 토번왕국이 무너진 후 왕실의 자손이 토번의 서쪽 지역 아리(阿里)에 세운 정권으로 번성기에는 아리지역 전체를 관할하기도 했다. (사진설명: 구거유적지 일각) 사서에 의하면 서기 843년에 토번왕이 불교를 멸하면서 왕실의 내란을 유발했고 그로부터 토번왕국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 중 불교를 수호하는 왕실의 자손들이 난을 피해 아리에 이르러 10세기경에 구거왕국을 세웠다.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7백여년동안 구거왕국은 티베트의 서부에 위치한 아리에서 불교를 선양하고 외적에 맞서면서 토번왕이 무너진 후 티베트 역사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진설명: 구거유적지로 가는 길) 고거유적지로 가려면 대부분 날이 어둑어둑 할 때 출발한다. 달리는 차창에 기대어 바라보면 길가의 언덕은 어둠속에서 흉물스러운 괴물을 방불케 하는데 자동차의 불빛은 날카로운 칼처럼 어둠을 찢는다. 최초로 구거유적지를 찾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많은 사람들이 불원천리 찾아와 구거문명의 매력에 빠지고 사라진 구거문명을 위해 슬퍼하는 이유를 잘 모른다. (사진설명: 아침놀의 구거유적지) 그러는 중에 저 앞에 사진이나 동영상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던 화면이 진실로 펼쳐진다. 높고 낮은 흙담들이 산세를 따라 손에 손잡고 붉은 지붕에 하얀 외벽의 궁궐을 떠받들고 있다. 첩첩한 흙담속에 안긴 구거는 그토록 안온하고 그러면서도 슬퍼보인다. 태양이 떠올라 따뜻한 햇빛이 서서히 비추자 황금색의 성은 화려한 빛을 뿌린다. 푸른 하늘에는...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1920
(사진설명: 아름다운 원명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두번째인 원명원(圓明園)은 사라져간 최고의 정원이다. 고도 베이징(北京)의 서북쪽에 최고의 풍수를 자랑하는 산수가 있어 예로부터 황실은 이 곳에 정원을 마련했다. 청(淸)을 세운 만족이 1680년 베이징에 입성해서 기마와 활쏘기를 잊지 않은 만족의 귀족들이 이 곳에 육속 황실정원을 조성했다. 그들은 황궁인 자금성(紫禁城)을 나와 북쪽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가서 고향의 기예를 닦았던 것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원명원) 옥천산(玉泉山)의 징청원(澄淸園)으로부터 시작해 그 뒤로 장장 180여년동안 만수산(萬壽山)과 옥천산, 향산(香山) 세 산에 창춘원(暢春園)과 원명원, 후에 정명원(靜明園)으로 개명된 징청원, 청의원(淸漪園), 정이원(靜宜園) 등 다섯 정원이 조성되었다. 청나라 전반에 걸쳐 황실 정원을 조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해본적 없고 정원을 조성하는 공사가 끊이지 않아 도성의 서산기슭, 만천하(萬泉河)강가에 엄청난 규모의 정원이 형성되게 되었다. (사진설명: 원명원 유적지의 무너진 기둥) 그 중 원명원은 중국 고전원림의 모든 아름다움을 한 몸에 모으고 서양건축물의 정수를 섭취하였으며 정교하고 귀중한 보물, 고전작품과 서예작품을 대량 소장해 정원중의 정원으로 인정되었다. 원명원의 육지건물규모는 자금성과 맞먹고 수면면적은 이화원(颐和園)의 크기이다. 1707년 청의 강희(康熙)제때에 시작되어 1860년의 함풍(咸豊)제에 이르기까지 원명원은 장장 150여년 동안 축조를 계속했다. (사진설명: 원명원 일각) 따라서 "원명원 정원 하나가 청나라 사서의 반"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대궐과 정원, 유럽풍의 바로크 건물을 갖춘 원명원은 가든과 궁정 두 가지 기능을 다 갖추었다. 옹정(雍正)제때부터 청의 황제들이 이 정원에 머물면서 원명원은 일반 황실정원으로부터 별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원명원은 가장 화려한...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045
(사진설명: 아름다운 은허)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첫번째인 은허(殷虛)는 사라진 한 왕궁의 축소판이다. 중국 최초의 고대 도읍 유적지 은허에서는 고대중국 문명의 심오함을 읽을수 있다. 은허는 중국 상(商)조 후반의 도읍유적지이고 갑골문(甲骨門)과 고고학 발굴에 의해 증명된 중국 최초의 고대 도읍 유적지이기도 하다. 2006년 7월 은허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사진설명: 한자의 비조 갑골문) 안양(安陽)의 원(洹)강 양안에 걸쳐 있는 은허는 현재 궁궐구역과 능침구역, 부족집거유적지, 가족묘지, 동굴, 구리주조 유적지, 옥 작업실, 뼈 작업실 등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역사상 사서에 기록되고 최초의 문자인 갑골문과 고고학 발굴에 의해 실증된 최초의 도읍유적지로써 은허는 현재까지 3300여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은허)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아무런 논쟁도 없는 중국 최초의 문명시대는 바로 상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그 상의 도읍지 유적인 은허는 간단한 건물이 아니라 도읍이다. 도읍은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 군사, 문화, 예의의 중심지이다. 도읍은 다른 유산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 왕국을 잘 보여줄수 있는 축소판인 것이다. 출처: 중국국제방송국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353
(사진설명: 아름다운 수미산석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열번째인 수미산(須彌山)석굴은 실크로드 연선에 위치한 석굴이다. 수미산 석굴은 웅장한 규모와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승부한다. 불교 우주관의 중심으로 인정되는 전설속 수미산은 높이가 200만리나 된다고 한다. 불조 석가모니가 바로 그 수미산 정상의 구름속에 앉아서 주변의 사대부주(四大部洲)를 향해 불경을 강의한다고 한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수미산) 중국 서북쪽의 녕하 자치구 고원시에 위치한 수미산이 언제 어떻게 수미산으로 불리우게 되었는지는 사서에 기록이 되어 있지 않으나 불교전설속의 수미산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다. 이 수미산은 높지도 않고 숲이 잘 조성되지 않아 헐거벗은 바위가 그대로 드러나 풍경명승하고는 거리가 멀다. 수미산 기슭의 사구자(寺口子)강도 물이 옅어 강바닥의 돌들이 보인다. (사진설명: 수미산 석굴) 석굴앞의 길에도 오가는 차량들이 많지 않아서 이 도로가 바로 과거 실크로드의 한 구간으로 이 도로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물품이 오갔었다는 것을 상상할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석굴은 세인의 평가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머리 들어 수미산을 바라보면 산 허리에 엄청난 크기의 미륵불의 좌상이 속세를 내려다 본다. (사진설명: 수미산의 미륵불상) 커다란 바위를 통채로 조각한 미륵불상은 커다란 두 귀를 늘어뜨리고 가사를 입은 채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 불상은 운강(雲岡)석굴의 노천 대불이나 용문(龍門)석굴의 루사나불보다도 더 크다. 당(唐)조때 축조된 미륵불은 천여년동안 그 한 자리를 지켜오면서 기나긴세월의 풍상고초를 겪고 헤아릴수 없이 많은 전란을 거치면서도 변함없는 모양을 유지한다. (사진설명: 수미산 석굴의 불상) 불교의 나라에는 크고...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269
(사진설명: 아름다운 향당산석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아홉번째인 향당산(響堂山)석굴은 영혼이 빛나는 석굴이다. 북제(北齊)때에 축조된 향당산 석굴은 엄밀한 구조와 정교한 조각, 앞뒤를 연결하는 예술적 풍격을 지닌다. 남향당산 석굴과 북향당산 석굴은 상호 수십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향당산 석굴은 규모에서는 돈황(敦煌)과 용문(龍門), 맥적산(麥積山), 운강(雲岡) 등 4대 고대 중국의 석굴에 비해 손색이 가지만 기법에서는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사진설명: 북향당산의 탑) 북향당산에는 현재 큰 규모의 산림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산기슭에는 송(宋)나라때 신축한 상락사(常樂寺)의 옛 터만 남아 있고 지상건물이란 오직 외롭게 솟은 탑과 변함없이 찾아드는 제비뿐이다. 북향당산의 석굴은 아찔한 절벽의 중턱에 조성되어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하늘과 더 가깝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상에서 멀리 떨어져야 더 잘 보존될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고대 중국인들은 대부분 석굴을 벼랑중턱에 조성했다. (사진설명: 북향당산 석굴의 일각) 그럼에도 절벽에 새겨진 정교한 불단내에는 불상이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빈 불단만 남아 있다. 하지만 향당산을 찾은 신도들은 텅 빈 불단을 향해 열심히 기도하며 경건하게 예배한다. 향당산 석굴 최대의 특징은 바위를 파서 조성한 석굴이 목조건물의 구조를 가진다는 점이다. 바위를 깎아서 처마와 대들보, 기둥, 창문을 조성하고 심지어 불상앞에 돌로 주렴을 드리우기도 했다. (사진설명: 목조건물모양의 향당산 석굴) 고대의 중국인들은 유난히 목조건물을 좋아해서 돌보다는 나무로 건물을 지었고 심지어 석굴과 같은 석조물의 모양도 목조를 본땄다. 그들은 돌이 더 단단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나무가 풍기는 부드러움과 은은함을 즐겼으리라. 나무속에는 영원히 대를 잇는 자연의 영혼이 스며있는...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650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