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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장안성: 어젯날 최대의 도시

작성자
판다번역
작성일
2014-02-12 15:36
조회
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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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장안성 유적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아홉번째인 장안성(長安城)유적지는 어젯날 만민이 우러르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한(漢)과 당(唐)의 역사와 상황을 알려면 장안을 보면 된다.

천여년의 도시사를 가진 옛 도시 장안은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4대 고도에 든다. 다큐 <대명궁(大明宮)>은 사서의 기록과 고고학 발굴에 의해 어젯날 장안의 건물을 그대로 재현했다.


(사진설명: 다큐 대명궁의 장안 건물)

다큐는 컴퓨터 기술을 활용해 웅장하고 화려한 당조 왕궁을 잘 보여준다. 모의기술로 재현된 대명궁을 보면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 천여년전 당조로 돌아간 듯 당조의 기개에 감탄하게 된다.

현실속의 대명궁은 오늘날 서안(西安)시 북쪽에 위치해 있고 벌써 옛터로 변했다. 사처에 농경지가 펼쳐지고 띄염띄염 동네들이 자리를 틀고 앉아 왕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진설명: 대명궁 인덕전 유적지)

대명궁은 부지가 명청(明淸)의 황궁인 자금성(紫禁城)에 비해 4배나 큰 당조의 황궁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 웅장한 황궁의 수많은 건물은 오간데 없고 폐허만 남아 있다.

대명궁의 서북쪽에 위치한 린덕전(麟德殿)은 원래 고대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궁궐이었다. 앞쪽과 가운데, 뒷쪽에 위치한 높고 낮은 세 채의 건물이 복잡한 구도를 형성한다.


(사진설명: 대명궁 함원전 유적지)

자금성의 주요 건물인 태화전(太和殿)에 비해 3배나 큰 린덕전은 당조때 국가 잔치를 베풀던 곳이었다.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린덕전도 대명궁의 빙산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당조때 국가적인 행사를 치르고 황제가 국사를 보던 장소는 함원전(含元殿)이다. 건물은 오간데 없지만 15m 높이의 단만 보아도 건물의 위엄과 웅장함을 피부로 느낄수 있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대명궁)

함원전의 건물은 두 팔을 벌린 듯 동남쪽과 서남쪽에 누각 두 채를 거느리고 본전과는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복도를 통해 연결되었다. 그러니 당시 모두들 "모든 관료는 장안을 우러르고, 만민은 함원을 참배하네"라고 했다.

대명궁은 원래 당의 태종(太宗)제가 부친이 노후를 보내도록 하기 위해 짓기 시작한 건물이었다. 그런데 토목공사를 갓 시작하자 부친이 세상을 뜨게 되어 공사가 중단되었다.


(사진설명: 대명궁 일각)

태종제의 아들은 고종(高宗)제가 즉위하고나서 공사를 다시 시작해 완공했고 대명궁이라 이름한 다음 수(隨)조때부터 황궁으로 사용하던 태극궁(太極宮)을 대체했다.

명실공히 정치의 중심지로 된 대명궁은 그로부터 이백여년동안 고종제와 당의 여황제 측천무후가 권력을 다투던 장소, 당명황(唐明皇)과 양귀비(楊貴妃)가 사랑을 나누던 장소로 되었다.


(사진설명: 당조 장안성터 일각)

당조의 장안성은 대명궁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수조 대흥성(大興城)을 토대로 증축한 성인데 오늘날까지 남아내려오는 장안성은 명(明)나라때 축조한 것이다.

당조 황성을 토대로 복원했는데 부지가 당시의 15%도 안 된다. 당시 곽성(郭城), 황성(皇城), 궁성(宮城) 등 세 겹의 성곽으로 구성된 장안성에는 백여만명이 살아 당시 인구가 가장 많고 부지가 가장 큰 세계 최대의 도시었다.


(사진설명: 장안의 대안탑)

하지만 아쉽게도 천여년의 세월속에 대부분 건물이 새로운 건물로 대체되었고 오늘까지 남아 있는 그 때의 건물로는 대안탑(大雁塔)과 소안탑(小雁塔)을 비롯한 극소수의 축조물뿐이다.

중국 동북의 발해국(渤海國) 상경(上京) 유적지와 일본 나라의 평성경(平城京) 에서 과거 장안성의 그림자를 찾아볼수 있다. 그들이 장안성을 본따서 조성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서한 장안성터)

현재 번화가로 변신한 당조의 장안성 서북쪽에 역사가 더 유구하고 보존이 더 잘 된 고도 서한(西漢) 장안성 유적지가 있다. 항우(項羽)를 이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진(秦)의 흥락궁(興樂宮)을 토대로 장락궁(長樂宮)을 증축했다.

그 뒤에 미앙궁(未央宮)을 신축하면서 한조 장안성이 조성을 시작하고 그로부터 천년 고도로서 장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혜제(蕙帝)때에 성곽을 쌓기 시작해 5년에 걸쳐 완공했다. 비록 흙으로 쌓은 성곽이지만 이천여년의 세월속에서도 드팀이 없다.


(사진설명: 미앙궁 옛터)

미앙궁의 본전은 흙으로 높은 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지었다. 멀리서부터 지상에 높이 솟은 단이 보인다. 미앙궁은 봉긋이 솟은 산둔덕을 이용해 지은 건물이다.

높은 단위에 세 채의 건물이 나란이 위치해 지고무상한 황권을 보여주었다. 미앙궁의 뒷쪽에 위치했던 궁궐과 아문유적지는 이제 모두 농경지로 변해 고고학적 발굴을 거쳐야먄 그 구도를 어렴풋이나마 볼수 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서한 장안성 유적지)

신축된 미앙궁은 장락궁을 대체해 서한의 권력중심지로 부상했고 장락궁은 태후의 거처로 되었다. 한무제(漢武帝)때 성안에 북궁(北宮)과 명광궁(明光宮)을 신축해 궁궐의 부지가 도시의 65%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에 성밖에 건장궁(建章宮)을 짓고 숲의 동산 임원(林苑)을 조성했으며 연못 곤명지(昆明池)를 팠다. 그로써 세계 최대의 고대도시 장안이 기본 틀을 갖추게 되었다.


(사진설명: 서한 장안성 유적지 일각)

서안의 장안성은 통일 제국의 도읍일 뿐만 아니라 로마와 어깨를 겨루는 국제적인 도시이기도 했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연결된 장안은 비록 이백년뒤에 농민봉기군에 의해 불타버렸지만 몇 백년뒤에 정치의 중심이 또 다시 장안에 자리잡으면서 장안은 찬란한 역사를 계속하게 되었다.

당이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당의 장안성을 조성한 것이다. 하지만 당의 장안성도 농민봉기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새로 들어선 정권이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면서 장안성은 폐허로 변하고 더는 중심지 역할을 되찾지 못했다.


(사진설명: 오늘날의 서안)

천년의 고도가 어젯날의 높은 위상을 잃고 어젯날의 눈부신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무너진 성벽과 키 높은 단만이 남아 어젯날의 모습을 되새기고 있을뿐이다.

설명:

장안성 유적지는 부지가 아주 넓고 대부분 지하에 묻혀 있다. 지상에 노출된 부분은 성벽과 일부 건물의 단 뿐이다. 따라서 중점적으로 선택해서 목적성있게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박물관을 찾아서 당시의 역사를 공부하고 출토된 문화재를 보면 완정한 관광이 될수 있다.


(사진설명: 유적지 공원광장)

위치: 섬서(陝西, Shanxi)성 서안(西安, Xi'an)시

교통: 다양한 교통편으로 서안에 이른 다음 도심 많은 곳에서 장안성 유적지를 경유하는 시내 버스를 이용한다. 택시를 사용해도 가격이 저렴하다. 한편 서안의 성벽과 비석의 숲, 대안탑, 소안탑 등을 함께 보면 더 도움이 된다.


출처: 중국국제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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