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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사진설명: 아름다운 진시황릉)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아홉번째인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 최초의 황제가 묻힌 무덤이고 순장묘인 병마용(兵馬俑)은 진시황릉의 규모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무덤의 묘실인 지하궁전이 개발되지 않은 진시황릉에 비해 발굴되어 명소로 부상한 진시황병마용이 더욱 인기 있다. 중국의 고도 서안(西安)을 찾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병마용을 꼭 가본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진시황제) 진나라의 시황제는 중국역사상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제의 봉건왕국을 세웠으며 스스로 시황제로 봉한 일은 전무후무하다. 그가 만든 군현제(郡縣)제 사회는 그 후 이천여년동안 중국의 사회제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심지어 중국건국 후에도 중국의 시골에서는 아직도 그 그림자를 엿 볼수 있을 정도이다. (사진설명: 진나라때의 화폐) 그는 문자와 차량 바퀴의 사이즈, 도량형, 법률, 화폐를 통일함으로써 국토가 넓어진 중국이 하나의 틀에서 운영되도록 했다. 이 또한 그 뒤의 이천여년동안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진반량(秦半兩)이라는 이름의 진나라 화폐는 겉은 둥글고 속은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뒤로 중국 각 왕조의 화폐가 모두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진시황릉) 진시황제는 불로장생을 소망하고 영원히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그는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러 많은 사람들을 파견하면서도 자신이 죽음을 면하지 못할것을 알고 13살에 군주로 임해서부터 자신의 능묘를 파기 시작해 죽을때까지 장장 37년동안 무덤을 조성했다. 그는 그에 앞서 산 사람을 순장하던 제도를 고쳐 흙으로 인형을 빚어 순장품으로 하려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순장품이...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3425
(사진설명: 아름다운 서한제릉)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여덟번째인 서한제릉(西漢帝陵)은 서한 황제의 무덤군락이다. 웅장한 규모의 능묘에서는 생과 사를 똑같이 본 한조때의 생사관을 잘 읽을수 있다. 서안시를 출발해 장안성(長安城) 유적지를 지나 위하(渭河)강을 건너면 함양시에 이르게 된다. 넓고 평평한 벌판이 높직하게 위치한 이 곳은 예로부터 군주와 장군들이 능묘로 선택되어왔다. (사진설명: 무덤의 봉분들) 함양시를 벗어나기 바쁘게 도로 양켠에 높고 낮은 봉분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드러낸다. 어림잡아 천여기에 달하는 무덤이다. 그야말로 "강남에서 재인이 나고 산동에서 장군이 나며 함양의 땅에는 황제가 묻혀 있네"라는 시 그대로이다. 무릉(茂陵)은 서한왕릉 중 가장 큰 능묘이다. 봉분의 높이가 46.5m에 달해 크기가 진시황(秦始皇)제의 무덤, 산을 무덤으로 한 당(唐)조의 왕릉 버금으로 간다. (사진설명: 한조왕릉 중 무릉) 한조때는 생과 사를 똑 같이 보는 경향이 있어서 황제들은 즉위하자 바람으로 자신의 능묘건설을 시작한다. 무릉의 주인 무제(武帝)는 54년동안 나라를 지배한 황제로 그 동안 나라의 세금총액 30%를 내서 무덤을 축조했다. 그로부터 무릉의 규모와 무릉에 묻힌 보물의 호화로움을 상상할수 있다. 아쉽게도 지하궁전이 지금까지 발굴되지 않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머리속으로 상상만 할수 있다. (사진설명: 무릉 주변의 작은 무덤) 서한의 최고 번성을 만든 무제는 주변에 많은 장군을 거느렸고 그런 장군들은 죽어서도 무제의 능묘주변에 묻혔다. 무릉에 올라서서 주변을 바라보면 위청(爲靑)과 확거병(霍去病)을 비롯한 명장군의 무덤이 지척에 있다. 무릉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확거병의 무덤은 현재 무릉박물관으로 개발되어 있다. 다른 무덤의 지상건물은 대부분...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335
(사진설명: 아름다운 서하왕릉)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일곱번째인 서하왕릉(西夏王陵)은 석양에 부르는 한 왕조의 절창이다. 이 곳에서는 서하국의 역사를 읽고 한 왕조의 흥망성쇄를 느낄수 있다. 중국 서부의 하란산(賀蘭山)기슭에서 당항족이라는 민족사이에 피비린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을 통해 서하(西夏)라는 왕조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그 왕조도 끝내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석양에 고요한 무덤뿐이다. (사진설명: 명랑한 서하왕릉) 정오의 태양이 뜨거울때 서하왕릉에 이르면 무상한 세월을 보여주는 듯 다양한 흙더미들이 풍부함을 자랑한다. 이 유적에서 서하의 어제를 다시 펼쳐보인 드라마들이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동양의 피라미드를 마주하면 권력을 위해 생사의 싸움을 펼치고 강물처럼 흐르는 핏물과 산처럼 싸인 시체위에 나라를 세웠지만 그것도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설명: 서하왕릉의 키 높은 봉분) 역사적으로 한 왕조가 세워지기까지 하늘땅이 뒤흔드는 진통을 거치고 왕조마다 사서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지만 모두가 어느날에는 사라지고 멸망에로 가는 길은 항상 비슷하다. 권력을 다투던 건국초기부터 왕조는 몰락의 길에 올라선 것이리라.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 색바랜 사서와 무너져 반만 남은 성, 어젯날의 웅장함과 찬란함은 없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키 높은 봉분에서 한때 강국으로 존재한 서하국의 존재를 볼수 있다. (사진설명: 석양아래의 서하왕릉)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면 햇빛이 부드러워지면서 온 하늘에 아름다운 놀을 남긴다. 그 노을에 저 멀리 솟은 하란산의 산발도 훨씬 부드럽게 보인다. 넓은 땅을 가진 서하국의 개국임금, 문자를 창제하고 관리제도를 건립했던 위인도 저 땅속에 길이 잠들어...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489
(사진설명: 아름다운 당대제릉)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여섯번째인 당대제릉(唐代帝陵)은 산을 무덤으로 하여 웅장한 기세를 자랑한다. 고대 중국의 왕릉 중 최고를 자랑하는 당대제릉에서는 석각예술이 극치이기도 하다. 과거에 벌써 국제 대도시였던 장안(長安), 오늘날의 서안(西安)에는 문화명소가 아주 많다. 그 중 비림(碑林)박물관 최고의 보물은 "소릉사준(昭陵四駿)"이라는 이름의 조각물이다. (사진설명: 소릉사준 석각물) 이 조각물은 심플한 무늬의 부조수법으로 4종의 우질 전마를 조각해 사람들에게 어젯날 피비린 전장을 느끼게 한다. 이 전마들은 모두 당조의 개국황제 태종(太宗)제가 아끼던 말들이다. 이 전마는 원래 당시의 유명화가가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조각해서 태종제의 무덤옆에 세워졌었다. 그때는 모두 여섯마리였으나 오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것이란 비림박물관에 남은 석각물 4점뿐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당대제릉) 무덤을 지키던 전마는 사라졌지만 태종제가 묻힌 소릉(昭陵)이 위치한 구종산(九嵕山)은 드팀없이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산을 능묘로 한 것은 당조때에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니지만 그때부터 당조의 황제들은 모두 산을 능묘로 하여 돈도 절약하고 도굴도 방지했다. 구종산을 중심으로 한 소릉은 부지가 200여제곱미터에 달한다. 구종산 주변에 흙을 쌓아 봉분을 조성한 무덤 180여기가 산재해 있는데 이런 무덤의 주인은 모두 당시 유명한 문신과 무신들이다. (사진설명: 당대제릉의 일각) 그들은 생전에 그랬듯이 죽어서도 황제의 주변에서 황제를 옹위하고 있는 것이다. 신하들의 무덤은 그들의 공덕에 근거해 다양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무장의 무덤은 생전에 그가 싸운 적 있던 산의 모양을 본땄다. 태종제는 당왕조를 번성으로 이끈...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875
(사진설명: 아름다운 장왕묘)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다섯번째인 경결(琼結) 장왕묘(藏王墓)는 천년의 세월동안 보리밭과 함께 한다. 토번왕국 임금의 무덤이 고요함속에 비범한 기개를 품고 있다. 어젯날의 유물이 많이 보존된 경결에 들어서면 마치 이 세상의 끝에라도 이른 듯 하다. 오늘날 도시든 시골이든 도로시설이 잘 되어 끝이 보이는 도로는 거의 없다. (사진설명: 경결의 도로) 하지만 경결에 이르면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경결에 이른 도로가 이 곳에서 멈추어 서서 더는 다른 곳으로 뻗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멈춘 경결의 도로에 서서 바라보면 계곡의 밭속에 몸을 숨긴 장왕묘가 한 눈에 보인다. 이 곳에 몸을 두면 누구든지 토번왕들이 왜 모두 이 곳을 자신의 영원한 종착지로 선정했는지를 알게 된다. 이 곳은 아마도 이 땅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장왕묘) 오늘날도 경결에서 유일한 거리로는 오가는 차량 한 대 보이지 않고 가끔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는 농부만 있을 뿐이다. 경결이라는 도시를 한 고패 도는데도 몇 분이면 족하다. 작은 동네를 벗어나 장왕교를 지나면 청과(靑稞)라고 하는 보리가 가득 자라는 벌판에 들어서고 장왕묘는 바로 그 벌판의 보리밭속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사진설명: 장왕묘와 보리밭과 농부) 여름에 가면 보리밭에서 풀을 뽑는 티베트족 여성들이 부르는 즐거운 노래를 들을수 있다.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토번왕이 이 곳에 천년을 누워있어도 전혀 외롭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하는 사람들은 관객을 보면 열정스레 손으로 장왕묘로 가는 길을 가리켜준다. 그...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641
(사진설명: 아름다운 청동릉)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네번째인 청동릉(淸東陵)은 창서산(昌瑞山)기슭의 풍수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다섯명의 청조황제와 열여명의 황후가 묻혀 있는 청동릉은 규모가 크고 건물이 정교하기 그지없다. 명(明)조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崇禎)제가 베이징(北京) 근교의 천수산(天壽山)기슭에 조성된 명조의 황제능묘인 명(明)13릉에 선택이 가능한 좋은 자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베이징에서 동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창서산 기슭에 자신의 무덤입지를 선정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청동릉) 하지만 숭정제의 능묘가 착공을 시작하기도 전에 명나라가 멸망되고 숭정제는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 그 바람에 숭정제는 자신이 선택한 능묘에 묻히지 못하고 청(淸)나라 황궁에 의해 명 13릉에 묻히게 되었다. 명을 멸하고 베이징에 입성한 청나라의 순치(順治)제가 몇년 뒤에 창서산을 주목하고 그 곳을 청조 황실의 능묘입지로 선택했다. 순치제가 별세하고나서 창서산에서 순치제의 능묘가 신축되고 그로부터 청동릉이 막을 열게 되었다. (사진설명: 창서산의 경치) 그로부터 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순치제의 뒤를 이어 강희(康熙)제와 건륭(乾隆)제, 함풍(咸豊)제, 동치(同治)제를 비롯한 청조의 황제 다섯과 십여명의 황후, 백여명의 비빈들이 이 곳에 묻히면서 청동릉이 조성되었다. 무슨 원인으로 민족과 출신이 다른 두 황제가 모두 이름도 나지 않은 이 곳을 자신의 능으로 하려 했을까? 그 답은 당연이 풍수이다. 제일 앞쪽에 높은 금성산(金星山)이 솟아 있고 가운데 상대적으로 낮은 영벽산(影壁山)이 있으며 그 뒤로 창서산이 병풍같이 둘러서 있다. (사진설명: 청서산과 청동릉) 세 산은 한 일(一)자를 이루고 주변에는 넓고 평탄한 벌이 펼쳐져 있다. 능묘의 북쪽에는 기복을 이룬 무령산(霧靈山)이 용처럼 지켜서 있고 그 사이의...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1952
(사진설명: 아름다운 공의 송릉)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세번째인 공의(巩義) 송릉(宋陵)은 밀밭을 가까이 한 가장 서민적인 황제의 무덤이다. 송조 황제의 이 무덤에는 당연히 북송(北宋) 석각예술이 집중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북송 황제의 능묘는 남쪽으로 숭산(崇山)에 기대고 서쪽으로 낙수(洛水)강을 끼며 북쪽으로 황하(黃河)강을 바라보는 하남(河南)성 공의시에 자리를 잡았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송릉 유적지 공원) 북송의 9명 황제 중 휘종(徽宗)제와 흠종(欽宗)제가 금나라에 잡혀가 객사한 외 여타 7명의 북송 황제가 모두 이 곳에 묻혀 있다. 7명 황제와 함께 황실의 구성원은 물론이고 북송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장군과 신하도 묻혀 송릉에는 도합 천여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고대 중국에서 송조는 약한 왕조로 공인된다. 쿠테타를 통해 왕권을 잡은 송태조(宋太祖)가 또 누군가 정변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할가 두려워 평생 무신을 누르고 문신을 중시해 나라의 군사력이 강화되지 못했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송릉의 위치) 태종(太宗)제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료(遼)나라와 싸웠으나 전패하고 활을 맞아 목숨을 잃었으며 진종(眞宗)제는 밀고 당긴 끝에 돈으로 평화를 바꾸었다. 송조 세 황제의 일생은 바로 북송 군사상황의 축소판이라 할수 있다. 북송은 당시 경제가 발달되고 상업이 흥기하며 과학이 선두를 달려 당시의 명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서 볼수 있는 번화한 도읍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경을 지키지 못해 수차 북방의 소수민족 정권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공의 송릉공원 일각) 1127년 금나라가 북송의 도읍이었던 개봉(開封)을 함략하고 휘종제와 흠종제를 포로해 북송이 멸망했다. 금나라 군대는 개봉을 약탈했을 뿐만 아니라 북송의 황제능묘도...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047
(사진설명: 아름다운 명13릉)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두번째인 명13릉(明十三陵)은 청나라 황제들이 묻힌 청산이다. 중국의 황제 능묘 중 가장 많은 황제가 묻힌 명 13릉의 열 셋 황제무덤에서 빼놓을수 없는 것은 장릉(長陵)과 정릉(定陵)의 지하궁전이다. 뒤에 산을 업고 앞으로 강물을 마주한 부지 80여 제곱킬로미터의 아늑한 벌판의 둘레에는 푸른 소나무가 울창한 청산이 둘러서고 그 속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흘러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명 13릉)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이 곳은 국립공원도 아니오 피서지도 아니며 사냥터는 더욱 아니다. 수백년전의 명(明)조때 이 곳은 경계가 삼엄하여 누구든지 범하는 자는 당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주변의 산에서 나무 한 그루 베거나 풀 한 포기를 뽑아도 잡혀서 형을 받았다. 이 곳이 바로 명조 13명 황제가 묻힌 무덤군락이다. 삼촌 명성조(明成祖)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죽어서도 명조 황제의 능묘에 묻히지 못한 명조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의 장손을 제외한 명조 13명의 황제가 모두 이 곳에 묻혀 있다. 심지어 나라를 멸망시키고 자결한 명조 망국의 마지막 황제 숭정(崇禎)제도 명조를 이어받은 청(淸)조의 황실에 의해 이 곳에 묻혔다. (사진설명: 명 13릉의 석 패방) 명 13릉의 구도와 급별은 주원장이 묻힌 남경(南京)의 명효릉(孝陵)을 이어받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효릉에 비해 구도가 더욱 치밀하다. 장릉을 중심으로 헌릉(獻陵)과 경릉(景陵), 유릉(裕陵), 무릉(茂陵), 태릉(泰陵), 강릉(康陵), 영릉(永陵), 소릉(昭陵), 정릉, 경릉(慶陵), 덕릉(德陵), 사릉(思陵) 등 12기의 무덤이 부채살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13기의 무덤은 각자 상대적으로 독립된 구도를 보유하는 동시에 하나의...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2087
(사진설명: 아름다운 황제릉)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첫번째인 황제릉(黃帝陵)은 문명의 비조가 묻힌 무덤이다. 이 곳에서는 반만년동안 지속해온 중국의 찬란한 문명을 읽을수 있다. <섬서통지(陝西通志) 능묘(陵墓)>에는 "중부(中部)현 동북쪽에 위치, 산의 모양이 다리와 같고 저수(沮水)강이 에돌아 흐르는 교산(橋山)이 바로 황제의 의관총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진설명: 조각으로 보는 황제) 전한데 의하면 황제는 110살까지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떠나는 황제를 아쉬워하던 서민들이 너도 나도 황제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아 황제는 옷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황제가 두고 간 옷과 물품을 교산 정상에 묻었고 그 것이 바로 황제릉 최초의 규모였다. 교산이 위치한 곳도 따라서 황릉(黃陵)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교산과 황제릉) 황릉현의 북쪽에 위치한 교산은 산체가 웅장하고 산 기슭으로 저수강이 흐르며 산에는 사철 푸른 고목이 무성해 영산의 분위기를 풍긴다. 신축한 헌원묘(軒轅廟)의 주변에는 푸른 소나무가 빼곡하고 문앞으로는 강물이 흐른다. 헌원묘의 앞에는 5천개의 큰 자갈을 깔아 광장을 조성했다. 이 광장에서는 5천명이 모여 제사를 지낼수 있는데 5천이라는 숫자는 5천년동안 지속된 중국의 문명을 대표하기도 한다. (사진설명: 5천년 수령의 소나무) 옛스러운 헌원묘의 정원에는 수령이 5천년에 달하는 소나무가 장관이다. 황제가 직접 심었다는 이 소나무는 소나무 줄기가 꿋꿋하게 뻗어 있고 최대의 너비는 11m에 달한다. 헌원묘 대궐의 한쪽에는 또한 황제의 발자국이 찍힌 바위가 놓여 있다. 전한데 의하면 이는 황제의 네번째 황비가 신발을 발명하고 황제의 신발을 만들때 취한 발자국이라고 한다. (사진설명: 황제의 발자국)...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1791
(사진설명: 아름다운 장안성 유적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 9중 아홉번째인 장안성(長安城)유적지는 어젯날 만민이 우러르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한(漢)과 당(唐)의 역사와 상황을 알려면 장안을 보면 된다. 천여년의 도시사를 가진 옛 도시 장안은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4대 고도에 든다. 다큐 <대명궁(大明宮)>은 사서의 기록과 고고학 발굴에 의해 어젯날 장안의 건물을 그대로 재현했다. (사진설명: 다큐 대명궁의 장안 건물) 다큐는 컴퓨터 기술을 활용해 웅장하고 화려한 당조 왕궁을 잘 보여준다. 모의기술로 재현된 대명궁을 보면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 천여년전 당조로 돌아간 듯 당조의 기개에 감탄하게 된다. 현실속의 대명궁은 오늘날 서안(西安)시 북쪽에 위치해 있고 벌써 옛터로 변했다. 사처에 농경지가 펼쳐지고 띄염띄염 동네들이 자리를 틀고 앉아 왕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진설명: 대명궁 인덕전 유적지) 대명궁은 부지가 명청(明淸)의 황궁인 자금성(紫禁城)에 비해 4배나 큰 당조의 황궁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 웅장한 황궁의 수많은 건물은 오간데 없고 폐허만 남아 있다. 대명궁의 서북쪽에 위치한 린덕전(麟德殿)은 원래 고대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궁궐이었다. 앞쪽과 가운데, 뒷쪽에 위치한 높고 낮은 세 채의 건물이 복잡한 구도를 형성한다. (사진설명: 대명궁 함원전 유적지) 자금성의 주요 건물인 태화전(太和殿)에 비해 3배나 큰 린덕전은 당조때 국가 잔치를 베풀던 곳이었다.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린덕전도 대명궁의 빙산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당조때 국가적인 행사를 치르고 황제가 국사를 보던 장소는 함원전(含元殿)이다. 건물은 오간데 없지만 15m 높이의 단만 보아도 건물의 위엄과 웅장함을 피부로 느낄수 있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판다번역 2014.02.12 추천 0 조회 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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