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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공의 송릉: 밀밭곁의 황제무덤

작성자
판다번역
작성일
2014-02-12 15:43
조회
2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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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공의 송릉)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세번째인 공의(巩義) 송릉(宋陵)은 밀밭을 가까이 한 가장 서민적인 황제의 무덤이다. 송조 황제의 이 무덤에는 당연히 북송(北宋) 석각예술이 집중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북송 황제의 능묘는 남쪽으로 숭산(崇山)에 기대고 서쪽으로 낙수(洛水)강을 끼며 북쪽으로 황하(黃河)강을 바라보는 하남(河南)성 공의시에 자리를 잡았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송릉 유적지 공원)

북송의 9명 황제 중 휘종(徽宗)제와 흠종(欽宗)제가 금나라에 잡혀가 객사한 외 여타 7명의 북송 황제가 모두 이 곳에 묻혀 있다. 7명 황제와 함께 황실의 구성원은 물론이고 북송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장군과 신하도 묻혀 송릉에는 도합 천여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고대 중국에서 송조는 약한 왕조로 공인된다. 쿠테타를 통해 왕권을 잡은 송태조(宋太祖)가 또 누군가 정변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할가 두려워 평생 무신을 누르고 문신을 중시해 나라의 군사력이 강화되지 못했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송릉의 위치)

태종(太宗)제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료(遼)나라와 싸웠으나 전패하고 활을 맞아 목숨을 잃었으며 진종(眞宗)제는 밀고 당긴 끝에 돈으로 평화를 바꾸었다.

송조 세 황제의 일생은 바로 북송 군사상황의 축소판이라 할수 있다. 북송은 당시 경제가 발달되고 상업이 흥기하며 과학이 선두를 달려 당시의 명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서 볼수 있는 번화한 도읍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경을 지키지 못해 수차 북방의 소수민족 정권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공의 송릉공원 일각)

1127년 금나라가 북송의 도읍이었던 개봉(開封)을 함략하고 휘종제와 흠종제를 포로해 북송이 멸망했다. 금나라 군대는 개봉을 약탈했을 뿐만 아니라 북송의 황제능묘도 마구 파헤쳤다.

북송의 민족영웅 악비(岳飛)가 잠시나마 황릉을 되찾고 무덤을 복원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공의는 북송의 군대와 금나라 군사가 서로 다투는 요충지로 되어 전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사진설명: 공의 송릉공원의 일각)

1132년 금나라의 후원으로 세워진 허수아비정권인 대제(大齊)가 개봉에 도읍을 정했다. 꼭두각시인만큼 자아를 잃어 전문 송조 황제의 무덤을 도굴하는 팀까지 만들어 금나라 군사가 미처 찾지 못한 무덤을 도굴했다.

금나라가 송릉을 통제하는 동안 국민의 송조에 대한 그리움을 끓어 버리기 위해 황제능묘의 지상건물을 모두 무너뜨려 폐허로 만들었다. 중국에서 조상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은 최고의 굴욕을 뜻한다. 중국의 많은 황제 능묘 중 이토록 처절한 굴욕을 당한 무덤은 공의 송릉뿐이다.


(사진설명: 공의 송릉공원의 일각)

세월이 흘러 오늘날 중국 각지에서 관광업에 열을 보인다. 공의도 예외가 아니다. 공의는 먼저 도심의 영소릉(永昭陵)에 담을 복원하고 문을 짓고 석인석수를 바로 세웠다.

이어 도로 바로 옆에 있는 영정릉(永定陵)을 관광지로 개발했다. 신도 양쪽에 키 높이 줄지은 백양나무는 능묘에만 있는 숙연함보다는 어울리지 않는 감을 준다.


(사진설명: 발속에 몸을 숨긴 능묘)

새로 포장한 능묘보다는 벌판에 몸을 숨긴 원초적인 능묘가 더욱 분위기에 어울린다. 밀밭이 봉긋이 솟은 봉분을 둘러싸고 신도에는 송조 백성의 그리움대신 고구마 덩굴이 엉켜있다.

머리를 건든 쳐든 돌사자가 지켜선 것은 웅장한 건물이 아니라 키 높이 자란 옥수수와 수수밭이다. 정오때면 기음을 매던 농부가 석수 그늘에 앉아 쉬고 황혼이 지면 꼬마들이 석인 장군의 등에 올라 놀음에 취해 있다.


(사진설명: 송릉의 석인석수)

현지인들로 말하면 천여년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이 석인석수는 항상 가까이 하는 평범한 물건에 지나지 않아 아주 익숙해 있다. 그들은 이런 석인석수를 파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조심스럽게 다루지도 않는다.

영창릉(永昌陵)에는 송조의 개국황제가 묻혀 있다. 능묘의 무성한 숲이 만드는 그늘에서는 현지의 노인들이 모여 장기룰 둔다. 그러다가도 관객이 나타나면 열정스럽게 맞이한다.


(사진설명: 송릉의 신도와 묘총)

계단을 밟고 보성에 올라 저 멀리 바라보면 저 멀리 숭산이 솟아 있고 동네 집의 지붕과 개발단지의 굴뚝이 보이는 가운데 푸른 밀이 탐스럽게 자라 그토록 고요하기만 하고 이 곳이 황제의 능묘이고 이 곳에서 과거 피비린 전쟁이 있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원대한 꿈을 가진 유능한 황제든 자신의 국토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황제든 이제는 모두 한 줌의 흙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황제들을 지켜선 석인과 석수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사람들의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사진설명: 송릉 숲속의 석인과 석수)

어젯날 송나라 국민들의 눈물과 금나라 병사들의 말발굽 소리도 멀어진지 오래다. 그로부터 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보면 그 때의 피비린 싸움도 형제들사이의 다툼으로 보인다.

도대체 누가 이 땅의 주인이고 누가 나그네인가? 능묘의 주인인 황제인가 아니면 장기를 두는 노인인가 혹은 이 곳을 보러 온 관객들인가? 나라의 주인이던 황제는 한 줌의 흙으로 변하고 다리 끊어진 석수는 천년의 세월을 이어온다.


(사진설명: 공의 송릉의 석인)

설명:

송릉의 황제 능묘는 서촌릉구(西村陵區)와 팔릉릉구(八陵陵區)에 집중되어 있고 그 중 상대적으로 잘 보존된 능묘는 팔릉릉구에 위치한 태종(太宗)제의 능묘인 영희릉(永熙陵)이다.

송릉의 명물은 석인과 석수이다. 그 중에서도 영유릉(永裕陵)의 사자, 영태릉(永泰陵)의 코끼리, 영희릉의 양이 최고로 송나라 석각의 대표작품으로 공인된다.


(사진설명: 공의 송릉의 석수)

위치: 하남(河南, Henan)성 공의(巩義, Gongyi)시

교통: 하남성 소재지 정주(鄭州, Zhengzhou)나 낙양(洛陽, Luoyang)에서 공의행 버스를 이용하면 1시간만에 도착이 가능하다. 공의시 버스터미널에서 영소릉행 버스와 서촌행 버스를 바꾸어 탄다.

계절: 가을 혹은 봄


출처: 중국국제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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