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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청동릉: 최고 풍수의 황제릉

작성자
판다번역
작성일
2014-02-12 15:43
조회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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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청동릉)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묘 10중 네번째인 청동릉(淸東陵)은 창서산(昌瑞山)기슭의 풍수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다섯명의 청조황제와 열여명의 황후가 묻혀 있는 청동릉은 규모가 크고 건물이 정교하기 그지없다.

명(明)조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崇禎)제가 베이징(北京) 근교의 천수산(天壽山)기슭에 조성된 명조의 황제능묘인 명(明)13릉에 선택이 가능한 좋은 자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베이징에서 동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창서산 기슭에 자신의 무덤입지를 선정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청동릉)

하지만 숭정제의 능묘가 착공을 시작하기도 전에 명나라가 멸망되고 숭정제는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 그 바람에 숭정제는 자신이 선택한 능묘에 묻히지 못하고 청(淸)나라 황궁에 의해 명 13릉에 묻히게 되었다.

명을 멸하고 베이징에 입성한 청나라의 순치(順治)제가 몇년 뒤에 창서산을 주목하고 그 곳을 청조 황실의 능묘입지로 선택했다. 순치제가 별세하고나서 창서산에서 순치제의 능묘가 신축되고 그로부터 청동릉이 막을 열게 되었다.


(사진설명: 창서산의 경치)

그로부터 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순치제의 뒤를 이어 강희(康熙)제와 건륭(乾隆)제, 함풍(咸豊)제, 동치(同治)제를 비롯한 청조의 황제 다섯과 십여명의 황후, 백여명의 비빈들이 이 곳에 묻히면서 청동릉이 조성되었다.

무슨 원인으로 민족과 출신이 다른 두 황제가 모두 이름도 나지 않은 이 곳을 자신의 능으로 하려 했을까? 그 답은 당연이 풍수이다. 제일 앞쪽에 높은 금성산(金星山)이 솟아 있고 가운데 상대적으로 낮은 영벽산(影壁山)이 있으며 그 뒤로 창서산이 병풍같이 둘러서 있다.


(사진설명: 청서산과 청동릉)

세 산은 한 일(一)자를 이루고 주변에는 넓고 평탄한 벌이 펼쳐져 있다. 능묘의 북쪽에는 기복을 이룬 무령산(霧靈山)이 용처럼 지켜서 있고 그 사이의 벌판에 황제의 능묘와 건물들이 산재해 있다.

능묘마다 딸려 있는 신도들이 나무가지처럼 주변의 환경과 어울리면서 청동릉을 하나로 만든다. 비록 순 자연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효릉)

효릉(孝陵)은 청동릉의 중심선상에 위치해 있다. 능묘임을 알리는 석패방과 붉은 문, 비루(碑樓), 석인석수, 용봉문(龍鳳門), 일공교(一孔橋), 칠공교(七孔橋), 오공교(五孔橋)는 신도와 함께 한 일자를 그으며 효릉의 건물에까지 닿아 있다.

거기거 굽이를 돌아 삼공교(三孔橋)를 지나면 효릉의 본전이 보인다. 삼공교 북쪽의 신도비는 붉은 문뒤의 비루에 세운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청조의 왕릉에만 있는 문화재이다.


(사진설명: 효릉의 신도비)

청조의 황제는 베이징에 입성한 다음 황실의 능묘를 기존 만족의 구조를 따른 것이 아니라 명조 능묘의 구도를 그대로 본땄다. 륭은문(隆恩門)과 륭은전, 능침문(陵寢門), 이주문(二柱門), 명루(明樓), 보정(寶頂) 등이 모두 명 13릉과 아주 비슷하고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을 따름이다.

청조의 건국초기라 경제력이 딸려서 인지 아니면 청의 왕실이 백성들의 노고를 헤아려서인지 순치제가 묻힌 효릉에는 또한 황제의 골회가 묻혀 있다. 오늘날까지 효릉의 지하궁전이 발굴되지 않아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사진설명: 경릉의 신공성덕비정)

강희제가 묻힌 경릉은 순치제의 효릉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효릉의 신도에서 갈라져 나온 경릉의 신도가 신공성덕비정까지 닿는다. 지붕이 날라가버린 비정에는 커다란 비석 2기가 세워져 있다.

경릉전에는 비정에 모두 비석 1기만 세웠는데 경릉부터 비석 2기를 세우고 강희제의 업적을 만족어와 한문으로 새겼다.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雍正)제가 어필로 글을 쓰고 옥쇠까지 찍었다.


(사진설명: 경릉의 석인석수)

경릉은 청동릉의 첫 능묘가 아닌 원인으로 원래는 패방과 붉은 문도 짓지 않고 석인석수도 세우지 않았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후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가 자신의 무덤에 석인석수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부친 옹정제의 무덤인 태릉(泰陵)과 할아버지 무덤인 경릉에 석인석수를 새로 세웠다.

마침 경릉의 신도가 곧지 않고 굽어 다른 신도와 달리 굽은 신도에 사자와 말, 코끼리, 무사, 문신들이 마주보는 특이한 경관이 펼쳐져 있다. 경릉을 통해 청나라 황실의 능묘구도가 완비해지게 되었다.


(사진설명: 유릉의 신도와 석인석수)

건륭제의 유릉(裕陵)은 청동릉에서 규모가 효릉 버금으로 간다. 상등 자재를 사용했고 석인석수만 봐도 경릉에는 다섯 쌍만 세웠는데 유릉에는 기린과 낙타, 산예를 추가해 도합 여덟쌍을 세웠다.

벌판에 흙을 쌓아 둔덕을 만들기도 했고 륭은전과 능침문사이의 옥대하(玉帶河)에는 세 개의 석교를 놓았다. 유릉의 지하궁전에는 관만 있고 다른 물건은 보이지 않으나 도굴이 불가능한 도처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과 무늬는 능묘의 품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진설명: 유릉 지하궁전의 정교한 조각)

지하궁전 첫번째 문앞에 세워진 돌사자와 부조석상 4대천왕, 청석에 새겨진 길한 물건들, 벽에 새겨진 공물, 문에 새겨진 아름다운 자태의 보살, 그리고 어디서나 볼수 있는 티베트어와 범어 불경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사람들은 지하궁전의 호화스러움에 혀를 두르는 동시에 그 정교한 조각기법에도 놀라게 된다. 유릉의 지하궁전은 중국에서 발굴된 능묘 지하궁전 중 조각이 가장 정교한 묘총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정릉)

정릉(定陵)은 비루를 세우지 않았지만 구조는 다른 황제의 능묘를 따랐다. 좁은 곳에 조성된 정릉이라 석인석수와 패루, 작은 비루, 륭은정, 보성, 명루 등이 일직선상에 높고 낮게 위치해 뒤에 청산을 배경으로 조화를 이룬다.

정릉의 호화로움은 황제의 능묘보다는 동쪽에 조성된 황후의 두 능묘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 황후의 능묘는 다른 능묘와 다르게 보이지 않지만 자희(慈禧)릉의 륭은전을 보면 그 호화로움을 읽을수 있다.


(사진설명: 정릉의 자희릉 륭은전 내부)

두겹으로 된 지붕을 떠인 륭은전은 귀중한 배나무로 지어졌고 나무에 채색의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건물 중 유일하게 모두 금박을 칠해 말 그대로 금빛이 찬란하다.

건물앞의 조각에는 용이 하단에 위치하고 봉황이 상단에 위치해 있다. 그로부터 황제를 대신해 수십년동안 청조를 지배해온 이 여성권력자의 숨은 뜻을 알수 있다.


(사진설명: 혜릉의 신도)

동치제의 무덤인 혜릉(惠陵)은 청동릉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능묘이다. 그때 청조가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때라 패방과 석인석수도 세우지 않고 돌기둥만 두 개를 마주 세웠다.

신도도 당시의 국력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청동릉의 주요 신도와 연결되지 않고 외롭게 뻗어 있다. 하지만 자희태후의 어지에 의해 목재만은 단단한 녹나무를 사용해 동으로 만든 대들보에 쇠로 만든 기둥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단, 아쉬운 점이라면 현재 효릉을 개관하지 않음으로 관람이 불가능한 것이다.


(사진설명: 청동릉 일각)

설명:

명 13릉과 달리 청동릉의 건물과 지하궁전에서는 모두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개관하지 않은 능묘로는 혜릉외에 소서릉(昭西陵), 효동릉(孝東陵), 친왕(親王)의 침전, 공주의 침전 등도 망라된다.

청등롱은 또한 비수기에는 개관명소라 할지라도 자안릉(慈安陵)과 문화재 전시실 등 주요하지 않은 명소는 차례로 휴무에 들어감으로 사전에 알아보는 것이 좋다.


(사진설명: 청동릉의 패방)

위치: 하북(河北, Hebei)성 준화(遵化, Zhunhua)현

교통: 베이징(北京, Beijing) 사혜(四惠, Sihui) 버스 터미널에서 준화행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청동릉역에서 하차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현지의 차량을 이용해 능묘에 진입한다.

계절: 가을


출처: 중국국제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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