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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사진설명: 아름다운 키질석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여덟번째인 키질석굴(克孜爾石窟)은 서역의 춘추이야기를 들려준다. 키질석굴은 중국 최초의 석굴이고 신강 최대의 석굴군락이며 옛 구자국문화의 견증이기도 하다. 실크로드가 경유하는 옛 구자국의 땅에 축조된 키질석굴은 위글어로 "붉은 색"을 의미한다. 뒤에 밍우타그산(明屋塔格山)을 업고 무자트(木札爾特)강과 체러타그산(却勒塔格山)을 마주한 키질이지만 광막한 서역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키질석굴) 장장 3km를 뻗은 키질석굴군락에는 기원 3세기부터 8,9세기까지 사이의 석굴 200여개가 산재해 있으며 축조 연대별로 다양한 예술풍격을 가지면서 네개 단계로 분류된다. 제1단계는 초창기로 3세기말부터 4세기 중반까지이다. 그 때의 벽화는 난색계열의 색상을 많이 사용하고 무늬가 굵직굵직하다. 인물도 귀가 크고 다리가 짧게 묘사되어 있다. (사진설명: 제47석굴 일각) 키질석굴에는 비록 돈황(敦煌)의 미묘함은 갖추지 못했지만 옛 구자국의 무용가가 풍만한 몸집으로 춤을 추고 열심히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의 표정도 아주 경건하다. 제47석굴은 키질석굴의 대표로 사람들은 당시 불교를 홍보한 쿠마라지바를 상징해서 앞쪽에 노천대불을 세웠을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고 남은 것이란 빈 터뿐이다. (사진설명: 상처투성이의 키질석굴) 대불도 없고 석굴 곳곳의 벽화도 긁어간 자리만 남으며 불상도 사라진 키질석굴을 보면 누구든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어젯날 구자국의 거작들이 이른바 문명한 현대의 탐험가나 고고학자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니 말이다. 상처투성이의 키질석굴을 마주하면 마치 팔다리가 나간 불상과 반 쪽 남은 벽화들이 현대인의 문화약탈에 눈물을 흘리면서 유감을 표시하고 탄식하는 듯 느껴진다. (사진설명: 쿠마라지바의 동상) 키질석굴을 대표하는 최고의 인물은 바로 인도로부터 구자국에 와서 불교를 홍보한...
판다번역 2013.12.16 추천 0 조회 2398
(사진설명: 아름다운 병령사)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일곱번째인 병령사(炳靈寺)는 아늑한 불교의 나라이다. 산 넘어 물 건너 교통이 불편하기 그지없는 병령사이기 때문에 이 곳에는 중국 석굴 중 가장 오래된 표지가 남아 있다. 병령사를 처음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곳은 교통이 참으로 불편하군요'라는 말로 시작한다. 병령사는 중국 제2의 하천인 황하(黃河)강가에 위치해 있다. (사진설명: 유가협의 푸른 황하강물) 황하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호방한 성격의 북방 사나이를 연상하지만 병령사기슭을 흐르는 황하강은 고요하고 수줍은 소녀의 모습으로 심산속에 숨은 보석처럼 푸르기만 하다. 유가협은 황하강을 가로 막아 조성한 댐이라 푸른 물의 수면은 끝간데 없이 넓고 저 멀리에는 몽롱한 산이 아름다운 무늬를 그린다. 물가의 집들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 모락 피어오른다. (사진설명: 병령협의 바위와 강물) 넓은 수면을 날으던 쾌속정이 병령협에 들어서면 물길이 갑자기 좋아지고 물빛이 다시 노랗게 변하며 양쪽에 칼로 깎아세운듯한 벼랑이 솟아 있다. 적갈색의 산체가 황하강물을 노랗게 물들인 것이다. 황하강의 양안에 바위의 숲을 형성한 이 경관이 바로 병령석림이다. 붉은 색의 사암이 억만년동안 바람과 물에 씻기면서 오늘같이 천태만상을 이루게 되었고 병령사는 바로 그 바위의 숲속에 위치해 있다. (사진설명: 병령사의 불상) 병령(炳靈)이란 '십만불'이라는 티베트어의 직역으로 병령사는 천불동(千佛洞)으로도 불리운다. 서기 300년부터 400년사이의 16국시대때 선비족이 세운 서진(西秦)왕조가 불교를 숭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진은 자국경내의 실크로드연선에 병령사를 세워 그 때 당시 병령사는 불교의 성지로 많은 스님은 물론이고 신도들도 대량 찾아들어 참배하고 석굴을 조성하는...
판다번역 2013.12.16 추천 0 조회 2278
(사진설명: 아름다운 맥적산석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여섯번째인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은 암벽위에 새겨진 동양의 조각박물관이다. 중국의 4대 석굴인 맥적산 석굴에서는 특히 정교한 진흙조각예술이 으뜸이다. 맥적산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 웅장한 기세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석굴은 대체로 산체의 하단에서 수평으로 펼쳐지는데 맥적산 석굴은 도끼로 깎은 듯 수직으로 솟은 100m높이의 암벽위에 층층이 상하좌우로 조성되어 있다. (사진설명: 가까이에서 본 맥적산 석굴) 암벽위에 조성된 석굴은 가장 낮아서 지상으로부터 2,30m 높이에 있고 최고의 높이는 7,80m에 달한다. 따라서 산기슭에 서서 보려면 머리를 한 껏 뒤로 젖혀야 석굴의 상단까지 바라볼수 있다. 암벽위에 줄지어선 석굴과 석굴사이에는 잔도를 깔았고 상하 잔도사이에는 계단을 조성했다. 암벽에 수직으로 기둥을 박아 조성한 잔도에 서서 발아래를 내려다 보면 공중에 선 듯 오싹해진다. (사진설명: 맥적산의 잔도) 선인들이 만들어놓은 잔도에 올라 선인들이 조성한 석굴을 보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아무런 현대적 시설도 갖추지 못했던 과거에 선인들은 어떻게 이런 거대한 공사를 했을까 하는 감탄이 스스로 나온다. 하물며 이런 공사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후진(後秦)에서 시작해 북위(北魏)를 거쳐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 오대(五代), 송(宋), 원(元), 명(明), 청(淸)에 이르기까지 장장 1,600여년을 지속했으니 그 어마어마함에 모두 말을 잃는다. (사진설명: 맥적산 석굴의 대불) 맥적산 석굴은 오늘날처럼 동서로 분류된 것이 아니라 완정하게 하나였다. 지난 천여년동안의 세월속에 수차 지진을 겪으면서 가운데 산체가 무너져 동쪽과 서쪽 암벽만 남아 있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대불 3기씩 조각되어 있다. 바닥에...
판다번역 2013.12.16 추천 0 조회 1865
(사진설명: 아름다운 공현석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다섯번째인 공현석굴(巩縣石窟)은 바위에 쓰여진 북위(北魏)왕조의 역사를 읽을수 있다. 중국의 불교석각예술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공현석굴은 인적이 닿지 않는 심산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중국 제2의 하천인 황하(黃河)강의 지천인 낙하(洛河)강은 하남(河南)의 산천을 흐른다. 낙하강은 아찔한 산봉과 깊은 계곡을 형성하지도 않고 푸른 파도 출렁이지도 않지만 핏줄처럼 두 시기의 불교석굴예술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사진설명: 낙하강과 공현석굴) 낙하강 상류에 위치한, 북위에 축조를 시작해 장장 반천년동안 지속한 용문(龍門)석굴은 벌써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만 낙하강 하류에 위치한 공현석굴은 여전히 소리소문없이 1500여년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소리소문없다는 것은 나쁜일만은 아닌것 같다. 용문석굴의 예불도(禮佛圖)가 미국의 박물관에서 외롭게 눈물 지을때 공현석굴의 예불도는 자신의 탄생지에서 천여년의 세월을 안온하게 보내고 있다. (사진설명: 공현석굴의 불상) 중국 불교석각예술의 공로자라면 역사의 흐름속에 묻혀버린 선비족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운강(雲岡)석굴에서 용문석굴에 이르기까지, 다시 공현석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선비족이 세운 북위왕조가 남긴 보물이기 때문이다. 공현석굴은 북위 선무제(宣武帝)때인 500년에서 503년사이에 축조를 시작해 동위(東魏)와 서위(西魏), 북제(北齊), 당(唐), 송(宋), 금(金), 명(明), 청(淸)조까지 축조를 계속해왔다. (사진설명: 공현석굴의 석각) 오늘날 공현석굴의 문화재 중 불상은 대부분 북위때 축조한 것이고 석각은 북제와 당조때의 것이 많다. 공현의 문화재는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의 특색을 이어받아 북위왕조 후반의 심플한 특징을 지닌다. 동시에 석각물은 북제와 수(隨)조 석각예술의 특징을 엿보이기도 해서 공현석굴은 중국의 불교석각예술이 북조로부터 당조로 넘어가는 과도기 예술풍을 보여준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공현석굴) 중국의 국보인 공현석굴이지만 명청풍의 건물을...
판다번역 2013.12.16 추천 0 조회 2378
(사진설명: 아름다운 대족석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네번째인 대족석굴(大足石窟)은 천지간 불(佛)의 존재만을 보여준다. 석굴의 후기 대표작으로써 대족석굴은 일상 생활의 모습으로 불교의 오묘한 이치를 해석한다. 대족이란 이름 그대로 발을 의미한다. 기복을 이룬 대지위에 거대한 불의 발자국이 우아하면서도 생동하게 찍혀 있다. 불교신도는 물론이고 발자국이 뭐 다를게 있을까 하면서 그 곳에 이른 사람들도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다. (사진설명: 봄날의 보정산) 봄이 되면 파촉(巴蜀)은 습윤한 기후로 항상 물안개속에 몽롱하며 가끔 보슬비가 소리없이 몸에 내려앉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산과 벌에는 노오란 유채꽃이 만발한데 봄을 알리는 뻐꾹새 소리에 대나무가지에 맺힌 이슬방울이 대지에 떨어진다. 길가의 학교에서는 꼬마들의 글읽는 소리가 하늘의 소리인 듯 낭랑하게 들려온다. 그 때면 사람들은 벌써 이 곳에 속세가 아닌 선경이라고 느끼는데 사실 그보다 선경은 앞에 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대족석각) 삼면이 붉은 암석에 둘러싸여 U자형의 거대한 발자국을 이루는데 그바위에 500m 길이의 종교예술 갤러리가 펼쳐져 장관이다. 아찔하니 높이 솟은 불상이든 손가락 크기의 불상이든 모두 정교함의 극치를 이룬다. 천년세월의 비바람과 풍상속에서도 기적같이 완정하게 보존된 석각은 마치 어떤 신비한 힘이 불교를 향한 선인들의 경건한 마음에 감동되어 오늘날까지 지켜오고 있는 듯 하다. (사진설명: 대족석각의 불상) 북산(北山)과 보정산(寶頂山), 남산(南山), 석전산(石篆山), 석문산(石門山) 마애로 구성된 대족석각은 중국 석굴예술의 전형이며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가장 화려한 세계 석굴예술의 한 폐지를 펼쳐보인다. 당(唐)대 안사(安史)의 난을 겪으면서 중국 북방의 불교조각은 점점 쇠퇴의...
판다번역 2013.12.16 추천 0 조회 2337
(사진설명: 아름다운 용문석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세번째인 용문석굴(龍門石窟)은 4대 중국석굴로 사라져간 5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문명을 돌에 새겨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있다. 서기 493년에 북위(北魏) 황제 효문제(孝文帝)가 도읍을 낙양(洛陽)으로 옮긴 후 축조를 시작한 용문석굴은 그 뒤로 서위(西魏), 북제(北齊), 수(隨)조, 당(唐)조, 송(宋)조, 명(明)조 등 역대에 걸쳐 장장 500여년동안 조성을 계속했다. (사진설명: 미소를 머금은 대불) 그 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석굴은 주로 북위와 당조 두 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전한데 의하면 당조때는 풍요롭고 즐거운 생활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로워 그 때 조성한 보살은 자애로운 얼굴에 즐거운 미소를 띈 "퇴근후의 보살"이라고 한다. 그런 조각들속에 서면 옛날 번화한 당조의 모습이 엿보인다. 온 세상 사람들이 찾아드는 중심의 나라 번화한 당조가 조각물에 구현되어 있다. 용문석굴을 대표하는 루사나(盧舍那) 대불도 당조의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의 모양을 본땄다고 한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용문석굴) 동서 양쪽에 두 산이 마주하고 그 사이로 이수(伊水)강이 흐르는 이 곳은 멀리서 보면 천연적으로 형성된 문을 방불케 한다. 그래서 지명도 이궐(伊闕)로 불리웠는데 수양제(隨煬帝)가 용문으로 개명했다. 용문은 마침 수나라 도읍인 낙양의 남쪽에 위치해 낙양성의 성문인 정정문(定鼎門)이 용문과 가까이 있었다. 따라서 수양제는 정정문을 나와 용문으로 향한다는 의미로 이궐이라는 지명을 용문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사진설명: 석굴의 불단) 이수강가의 청석을 밟으며 걷노라면 벼랑에 크고 작은 불단이 즐비한 것이 보인다. 반천년의 세월을 거쳐 용문석굴에는 불단 2100여개, 불상은 10만여기, 비석조각은 3600여점에 달한다. 불상은 혹은 입상이거나 와상이며 심지어 걷거나...
판다번역 2013.12.16 추천 0 조회 2137
(사진설명: 아름다운 운강석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두번째인 운강석굴(雲岡石窟)은 4대 중국석굴 중 규모가 가장 웅장하고 석굴의 내용이 가장 풍부한 석굴이다. 운강석굴은 또한 멀어져가는 선비족의 뒷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기 453년에 담요(曇曜)라는 스님이 당시 북위(北魏)의 수도인 평성(平城) 북쪽의 주무산(周武山)에 이른 뒤로부터 494년에 효문제(孝文帝)가 도읍을 낙양(洛陽)으로 옮길때까지 수십년동안 이 곳에서는 돌 깎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운강석굴) 담요의 굳은 신앙과 황실의 후원으로 장장 1km나 뻗은 예술의 걸작 운강석굴이 조성됐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석굴은 45개이고 그 속에 보존된 석상은 5만여기에 달한다. 운강석굴은 2001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운강석굴을 이렇게 평가했다. "운강석굴은 5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중국 불교석굴예술을 대표한다." (사진설명: 북위의 글자체 위비체) 운강굴은 음미할만한 민족인 선비족과 갈라놓을수 없다. 싸움을 즐기는 선비족이 중국을 통일하고 북위를 세운 후 앞서가는 문명을 받아들였다. 호방한 선비족의 성격은 섬세한 문명에 정복되어 문명으로 가는 길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중화민족의 구성원으로 융합되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서기 386년부터 534년까지 짧은 시간동안 존속했지만 최고로 눈부신 유산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대범하고 힘있는 필치의 위비체(魏碑體)이다. 이 글자체는 역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본땄고 컴퓨터세상인 오늘날에도 메인폰드로 남아 있다. (사진설명: 운강석굴의 석상) 북위는 석각예술분야에서 더욱 전무후무의 성과를 거두었다. 문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효문제가 편 한화(漢和)정책이 석굴에 반영되어 인물의 모양이나 의상이 모두 한(漢)족을 본따고 있다. 그로부터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청수한 몰골의 인물상이 중국에 널리 퍼져 중국북방에...
판다번역 2013.12.16 추천 0 조회 2263
(사진설명: 아름다운 돈황막고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첫번째인 돈황막고굴(敦煌莫高窟)은 4대 중국 석굴 중 하나인 동시에 세계적으로도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정하게 보전된 불교예술의 보고이다. 사막속 선녀의 전설을 이야기 하는 돈황막고굴은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전인 서기 366년에 축조를 시작했다. "인류문명의 서광"으로 불리우는 돈황막고굴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사진설명: 삼위산 일각) 막고굴에 관해서는 사막의 한 사람이 계를 행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면서 석장을 들고 이 땅을 돌다가 이 산에 이르러 금빛의 불빛을 보고 불이 있는 곳이라 인정해서 석굴을 팠다는 내용의 기록이 남아 있다. 사서에서 말하는 이 산이 바로 삼위산(三危山)이고 금빛의 불빛이 불광이다. 막고굴은 애초부터 종교의 기묘한 전설속에서 조성된 것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사진설명: 막고굴의 석굴) 돈황에 조성된 400여개의 석굴 중 오늘날 우리가 볼수 있는 곳은 겨우 10개뿐이다. 관광객들의 호흡을 통해 속세의 번잡함이 석굴에 스며 귀중한 화면과 색채에 영향을 준다. 돈황막고굴에 들때는 카메라와 캠코더와 같은 현대식 설비는 절대 휴대금지이다. 입구에서 엄격하게 검사함으로 사람들은 몸과 마음만 가지고 석굴에 들어간다. (사진설명: 막고굴의 석굴내부) 카메라와 캠코더의 셔터소리도 없고 눈부신 플래시도 없어서 귀중한 보물의 보호에 도움이 된다. 또한 기념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할 일이 없어진 관객들은 오히려 눈과 마음으로만 보물들을 주의깊게 볼수 있다. 관광지나 명소에 가면 모두들 그 순간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남기려고 하는데 사실 최고의 아름다움은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기록하기 보다 마음으로 기억하는 것이 더 오래도록 남게 된다. (사진설명: 막고굴의 석굴내부) 가이드를...
판다번역 2013.12.16 추천 0 조회 3341
(사진설명: 아름다운 동심사)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12중 열 두번째인 동심청진대사(同心淸眞大寺)는 동서양 건축이 조화롭게 접목된 이슬람사원이다. 중국 10대 이슬람사원인 동심사는 중국의 전통건축기법과 이슬람교의 장식예술을 완벽하게 접목했다. 중국에는 수도 베이징(北京)에 이슬람교의 거리가 조성된 외 광주(廣州)에 회성사(懷聖寺), 천주(泉州)에 청정사(淸淨寺), 항주(杭州)에 봉황사(鳳凰寺), 양주(揚州)에 선학사(仙鶴寺)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에 이슬람교사원이 있다. (사진설명: 중국의 회족) 이슬람교는 많은 페르시아인과 아랍인들이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한 7세기경에 중국에 전파되었다. 그 뒤에 중동 아시아의 무슬림들이 육지 실크로드를 통해 대거 중국에 진출해 한(漢)족과 몽골족 등 여타 민족의 특성을 모아 회(回)족이라는 민족을 형성했다. 오늘날 중국에 사는 회족은 인구는 천만에 다다를 정도로 많으나 대부분 각 지에 산재해 있고 그 중 상대적으로 많이 집중된 지역이 바로 녕하로 녕하는 회족자치구로 정해져 있다. (사진설명: 동심현 일각) 동심현에 이르면 벌써 회족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거리와 골목에는 모두 하얀 모자를 쓴 사람들이 오가고 하랄음식점이 아닌 음식점을 찾을수가 없으며 도처에서 이슬람사원을 볼수 있다. 녕하에는 이슬람사원이 도합 2천여채가 있고 그 중 6백여채가 동심현에 있다. 이런 이슬람사원들은 기나긴 세월동안 육속 지어진 것인데 사람들은 역사가 유구하고 잘 보전된 사원을 일컬어 청진대사(淸眞大寺)라 한다. (사진설명: 이슬람사원의 조벽) 대궐상단의 조각달만 없으면 사람들은 이 사원이 이슬람사원이 아니라 불교사원인줄 착각한다. 문앞에 여덟 팔(八)자형으로 조성된 조벽(照壁)의 중앙에는 소나무숲속의 달이 조각되어 있다. 조벽은 벽돌을 쌓아 조성했고 조각도 벽돌조각이며 조벽의 상단에는 중국의 전통 목조가옥을 본따서 복잡한...
판다번역 2013.11.25 추천 0 조회 1777
(사진설명: 아름다운 오당소)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12중 열 한번째인 오당소(五當召)는 깊은 산중의 사원이다. 오당소는 내몽골 최대의 티베트 불교사원인 동시에 4대 중국 티베트 불교사원이기도 하다. 끝간데 없이 펼쳐진 망망한 초원에 사는 사람들은 풀이 살찐 물가에 터를 잡고 살아오면서 땅이 만물의 조물주라고 인정했다. 따라서 산과 물, 숲, 바위 등 그 땅위의 모든 것을 숭배하기도 한다. (사진설명: 초원위의 돌무더기) 그들은 이 땅의 모든 것에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인정하고 초원의 곳곳마다 돌이나 흙을 쌓고 오포(敖包)라 이름하는 그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 것이 바로 샤머니즘의 일종인 것이다. 하지만 몽골어로 부를 소(召)자는 사원을 의미하는데 그런 사원은 샤머니즘의 장소보다는 티베트풍과 내륙지역 한(漢)족풍으로 된 건물을 가진 머나먼 티베트에서 전파되어 티베트 불교의 사원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오당소) 내몽골지역에서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게 된데는 13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몽골족이 큰 세력을 형성한 반면에 티베트지역은 줄곧 갈기갈기 찢어진 국면이였다. 지배자로 군림한 몽골족은 티베트 불교 중 사가파의 두령을 선택해서 모사로 썼고 사가파는 몽골족의 힘을 빌어 티베트의 종교를 총괄했다. 그로부터 티베트는 원(元)나라 중앙정부에 속하고 몽골족도 티베트 불교를 신앙하게 되었다. (사진설명: 웅장한 오당소) 원나라가 멸망한 후 같은 티베트 불교이지만 밀교(密敎)인 사가파가 쇠퇴의 길에 들어서고 황교(黃敎)인 겔룩파가 성행하게 되었다. 청(淸)나라도 서북지역의 소수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내몽골 지역에 많은 티베트 사원을 지었다. 그 중 청나라때 신축한 티베트 사원 오당소가 대표이다. 비스듬한 산발을 따라 첩첩하게 조성된 오당소는...
판다번역 2013.11.25 추천 0 조회 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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