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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사진설명: 아름다운 민가 개평조루)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9 중 아홉번째인 개평조루(開平碉樓)는 대나무숲속에 자리잡은 망루들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개평조루는 서양의 다양한 건축양식과 중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접목해 특이한 경관을 이룬다. 오늘날 광동(廣東)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원래는 중국 중부에 살다가 천여년전의 남송(南宋)때 전란을 피해 가족들을 거느리고 남하해 광동의 주강(珠江)일대에 이르러 밭을 일구고 집을 지어 터를 잡고 자자손손 살고 있다. (사진설명: 특이한 모양의 조루) 광동에서도 개평은 특히 땅은 적고 사람은 많은데다가 여름이면 홍수가 지고 현지의 토박이와 이주한 사람들간에 다툼이 심해져 사람들은 또 다시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태평양의 저쪽으로 떠났다. 고향을 등지고 해외로 나가 화교(華僑)로 불리우는 중국인들 최고의 꿈은 돈을 벌어 금의환향하는 것이었다. 화교들은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했고 그들 중 일부가 부를 성공해 부를 모으게 되었다. (사진설명: 조루들의 모임) 타향에서 돈을 번 화교들이 고향에 돌아오자 고향사람들이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는 동시에 도적떼들도 찾아와 일부는 고향생활을 다시 시작하지도 못하고 화적에 의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개평은 태평하기 시작하다는 의미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예로부터 사회가 불안정하고 치안이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회(新會)와 대산(台山), 은평(恩平), 신흥(申興) 네 현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개평이라 어느 누구의 관할도 미치지 못했고 따라서 화적떼들의 세상으로 되었던 것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조루) 개평인들은 하는 수 없이 스스로 살아 남는 방법을 생각했고 화교들은 외국의 건축양식을 접목해 조루라는 특이한 건축물을 지었는데 망루형의 건축이라 화적을 막는데 효과가 좋았다. 그...
판다번역 2013.09.27 추천 0 조회 2625
(사진설명: 아름다운 민가 석가대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9 중 여덟번째인 석가대원(石家大院)은 중국의 화북지역에 위치한 운하기슭의 호화저택이다. 백여년전 청(淸)나라 후반에 지은 석가대원은 중국 북방 건축예술의 대표이다. 백여년전 천진(天津)에는 해운을 업으로 하는 한(韓)씨와 소금업무의 고(高)씨, 식량수송업의 석(石)씨, 식량업의 유(劉)씨, 엽차업의 목(穆)씨, 소금업의 황(黃)씨와 양(楊)씨, 장(張)씨 등을 비롯해 8대 가문이 있었다. (사진설명: 석가대원 입구) 그들은 바로 천진을 경유하는 남북향의 물길인 운하(運河)를 이용해 소금과 식량을 수송하면서 부를 축적했고 그 돈으로 땅을 사고 집을 지으면서 가문을 성장시켰다. 그 중 석가대원은 1875년에 거금을 들여 축조한 석씨가문의 저택으로 열여덟개의 뜰을 조성했는데 뜰속에 뜰이 있고 네모난 사합원식 건물들이 줄지어 장관이었다. (사진설명: 석가대원의 조각) 석가대원에는 벽돌조각과 목각, 석각이 정교하고 화려한데 건물의 디자인은 당시의 청나라 황궁을 본땄다고 한다. 그러니 그때 당시 석씨가문이 얼마나 앞서가는지를 알수 있다. 아담한 아치형 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긴 복도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존미당(尊美堂에 이르게 된다. 존미당은 석씨가문이 조성한 네 채의 저택 중 유일하게 보존된 한 채이다. (사진설명: 존미당의 일각) 존미당은 주홍색 문의 양쪽에 붉은 초롱이 걸려 있고 굵은 기둥에는 길상을 나타내는 조각이 즐비하며 문앞에는 정교한 돌북이 놓여져 있다. 그밖에 어항속의 물고기와 활짝 피어난 꽃이 석씨가문의 찬란했던 어제를 보여준다. 오늘날 석가대원은 양류청(楊柳靑) 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어 혼인풍속과 목판세화, 옛길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이 전시되고 청나라때의 정교한 가구도 전시되어 있다. (사진설명: 석가대원의 극장) 석가대원에서 가장...
판다번역 2013.09.24 추천 0 조회 2319
(사진설명: 아름다운 민가 엄가대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9 중 일곱번째인 엄가대원(嚴家大院)은 화려한 바이족의 가옥이다. 패방(牌坊)과 조벽(照壁), 마당, 건물 모두가 바이족문화와 유교문화의 접목을 잘 보여준다. 희주(喜洲)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낯선 지명이다. 하지만 바이족 청년들의 사랑을 노래한 영화 "다섯 김화(五朵金花)"를 희주에서 촬영했다고 하면 거의 모든 중국인들은 너무나 잘 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인다. (사진설명; 대리의 벌판과 동네) 그 영화에는 바이족들이 모여 사는 운남 대리의 다양한 경치들이 담겨져 있다. 영화는 두 도시인이 마차를 타고 대리를 돌아다니면서 본 바이족 여성 다섯명의 사랑이야기들을 묘사한다. 오늘날도 대리에서 희주까지는 마차를 탄다. 마차를 타고 고요한 시골의 오솔길을 달리노라면 여로의 피곤이 한꺼번에 가시고 기분이 좋아진다. 길가에는 탐스러운 곡식들이 자라고 저 멀리에는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물들이 가끔 보인다. (사진설명: 시골의 마차) 마차가 있으면 마차꾼이 있기 마련이다. 대리의 대부분 마차꾼들은 현지인으로 희주의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도 너무 잘 알아서 말을 달리는 한편 쉬지 않고 설명을 늘여놓는다. 대리에서는 기둥없이 돌로만 벽을 쌓아도 무너지지 않고 바람이 불어와 마당을 쓸며 처녀는 아줌마라 부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꽃이라고 하면 자연의 꽃보다는 바이족 여성들이 머리에 꽂은 꽃을 말한다고 주의를 주기도 한다. (사진설명: 민가의 조벽) 그리고는 "삼방일조벽(三坊一照壁), 사합오천정(四合五天井)"이라는 두 마디로 바이족 가옥의 건축특징을 설명한다. 방(坊)은 아치형으로 된 문인 패방을 말하고 벽(壁)은 정문 바로 뒤에 세운 병풍모양의 벽체를 말한다. 따라서 바이족의 집에 들어가려면 필히 조벽을 에둘러 가야...
판다번역 2013.09.24 추천 0 조회 2566
(사진설명: 아름다운 민가 석가산)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9 중 여번째인 석가산(夕佳山)은 인간과 백로의 낙원이다. 수천마리의 하얀 백로들이 명청(明淸)시기의 고건물에 살면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룬다. 백로와 같은 조류는 도시를 멀리 떠나 대나무 우거지고 맑은 물 졸졸 흐르는 자연속에 둥지를 튼다. 외딴 깊은 산속의 민가 석가산은 그래서 백로의 선택을 받았을것이다. (사진설명: 석가산과 백로) 석가산은 "중국 민간 건축예술의 활화석"이니 "사천남부 농경문화의 축소판"이니 하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귀로 듣기만 한 사람들은 대부분 흘려 들으면서 죽해와 같은 명소만 보고 석가산을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명소를 보고나서 시간이 좀 남아서 석가산을 가 본 사람들은 홍보물에는 나타나지 않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석가산의 경관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사진설명: 석가산의 숲과 백로) 석가산의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귀맛좋은 새들의 울음소리가 손님을 맞이한다. 그것도 새장안에 갖힌 한 두 마리가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떼를 지어 부르는 합창이다. 머리 들어 바라보면 담이 둘러선 산언덕에 고목이 무성한데 흰 구름이 나무가지에 내려앉은 듯 수많은 백로가 그 속에 깃들고 있다. 나무가지에는 거무스레한 새둥지들이 가득한데 백로들은 우아하게 하늘을 날기도 하고 혹은 나무가지에 사뿐 내려앉아 여기저기 둘러본다. (사진설명: 고건물과 백로) 사천의 시골에서는 길다란 두 다리로 논을 산책하는 날씬하고 우아한 백로를 가끔 볼수 있다. 하지만 석가산의 백로는 몇 마리가 아니라 백이나 천을 헤아리는 대가족이다. 중국인들은 "꾀꼬리 두 마리는 버드나무숲에서 우짖고 백로는 한줄로 푸른 하늘에 오르네"라는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판다번역 2013.09.24 추천 0 조회 2362
(사진설명: 아름다운 민가 강씨장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9 중 다번째인 강씨장원(姜氏庄園)은 고원의 보루식 토굴집이다. 황토고원에서 가장 호화롭고 가장 대표적인 토굴식 건물인 강씨장원은 교묘한 설계와 엄밀한 구도를 자랑한다. 강씨장원은 과거에 은주(銀州)로 불리운 미지(米脂)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은주나 미지라고 하면 사람들은 비녀나 장식물과 같이 여인과 연관된 것들을 머리에 떠올린다. (사진설명: 강씨장원의 문) 그래서 인지 미지에서는 미녀가 많이 난다. 여름이면 땡볕에 뜨겁고 봄에는 모래바람이 불지만 맑은 물과 맛 있는 좁쌀, 고소한 나귀곱창 등 음식이 미인을 만든다. 강씨장원의 주인은 청(淸)나라때 섬서성 북부에서 가장 돈이 많은 지주였다. 강씨는 베이징(北京)에서 전문가를 초청해오고 온갖 장인들을 모아 16년이라는 시간을 들려 이 장원을 조성했다. (사진설명: 산마루의 강씨장원) 토굴식 건물인 강씨장원은 호화판 사택이라기보다는 산 마루에 자리잡은 보루로 황막한 고원에 웅좌한 맹주의 기개를 보여준다. 8m 높이의 담이 장원을 둘러싸고 있으며 높은 곳에는 포대까지 마련되어 공격은 힘들고 수비에 좋은 군사적 특징을 보여준다. 밖에서 보면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계가 삼엄한데 장원에 들어서면 토굴식 정원이 펼쳐지고 정교한 조각이 즐비한 아담한 문이 외관의 차거운 분위기를 따뜻한 문화적 분위기로 바꾼다. (사진설명: 강씨장원 정원과 건물) 강씨장원은 황토고원에서 흔히 보는 토굴식 건물이지만 일반적인 토굴과는 다르다. 상하 3층으로 된 입체 정원은 숨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토굴에는 비스듬한 지붕이 조성되어 있다. 문기둥 양쪽에는 돌로 만든 북이 놓여져 있고 문턱도 돌로 되어 있다. 정문 바로 뒤에는 청색의 벽돌로 조벽을 조성하고...
판다번역 2013.09.24 추천 0 조회 2705
(사진설명: 아름다운 민가 유씨장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9 중 네번째인 유씨장원(劉氏庄園)은 세월속에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저택이다. 유씨장원은 뾰족한 고딕 양식의 지붕과 곧게 솟은 바로크 양식의 기둥에 중국풍의 장식이 어울리는, 한번 보면 잊지 못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40대이상의 중국인들은 지주 유문채(劉文彩)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학교 다닐때 교과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군 지주의 대표가 바로 유문채였고 그로 인해 유씨장원은 1960,70년대에 벌써 명소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유씨장원 입구) 지난 수십년동안 사천(四川)성 성도(成都)벌판에 위치한 유씨장원은 수차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 오늘에 이른다. 1960년대에는 수조원(收租院)으로 불리웠고 1980년대에는 유씨공관으로 불리우다가 1990년대에 유씨장원박물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수조원으로 불리우던 초창기에 유씨장원은 지주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머슴들의 비참한 생활을 비교하는 교육의 장소였다. 그러니 분노로 가득찬 관객들이 어찌 건물의 아름다움을 볼수 있고 그 것을 보존할수 있었겠는가? (사진설명: 유씨장원의 마당)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지주 유문채의 사치스러운 생활의 흔적보다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유씨장원은 백여년전의 청(淸)나라후반에 유문채와 그 형제들이 축조한 다섯채의 공관과 유씨가문의 고향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545채에 달하는 유씨장원의 건물들은 남쪽과 북쪽으로 분류되어 위치해 있다. 지나치게 화려한 생활을 한 건물주인은 본받을바가 아니지만 서양식의 건축양식과 중국식 건축양식을 조화롭게 접목한 건물은 명물이다. (사진설명: 유씨장원 침실일각) 중국에서 가장 완정하게 보존되고 규모가 가장 큰 지주의 장원으로써 유씨장원에는 볼거리가 적지 않다. 구공관에 들어서면 포드자동차와 모던한 소파가 전시되고 대들보와 기둥에 조각이 화려한 침실이 어젯날 건물주인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펼쳐보인다. 심지어...
판다번역 2013.09.12 추천 0 조회 2727
(사진설명: 아름다운 민가 강백만장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9 중 세번째인 강백만장원(康百萬庄園)은 부의 사백년 신화를 이루어낸 곳이다. 강백만장원은 고대 중국 당(唐)나라때 시인 두보(杜甫)의 고향인 하남(河南)성 공의(巩義)시에 위치해 있다. 망산(邙山)을 뒤에 업은 강백만장원의 앞쪽으로는 낙하(洛河)강이 흐르고 망산의 저쪽으로는 황하(黃河)강이 저 멀리 흘러 좋은 풍수를 자랑하고 따라서 부의 신화를 이루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사진설명: 강백만장원의 입구) 강백만은 수백년을 이어온 명청(明淸)시기 공의지역에서 살아온 강응괴(康應魁)가문을 일컫는다. 모두들 부는 3대를 넘지 못한다고들 하지만 강씨가문은 12대에 걸쳐 장장 사백여년동안 부를 유지했다. 1901년 8개국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해 당시의 청나라 태후 자희(慈禧)가 도읍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주하는 중에 이 곳에 이르렀다. 강씨가문은 거액을 들여 어가(御街)를 깔고 다리와 행궁을 축조하고 황족을 맞이했으며 매일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는 잔치를 베푼 외 은 백만량을 기부해 자희태후로부터 강백만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사진설명: 위에서 본 강백만장원) 명나라초반부터 가문이 머물 저택을 축조하기 시작한 강씨가문은 천인합일과 자연순응의 이념에 따라 기복을 이루는 망산에 터를 잡았다. 산세를 따라 담을 쌓고 도로가에 건물을 지었으며 물가에는 나루터를 조성했다. 강백만장원에는 저택과 서원(書院), 극장, 사당, 가든, 채소밭, 임지, 패방, 조선소, 능묘 등을 비롯해 다양한 축조물들이 있으며 최고의 번성기에는 건물들이 망산기슭에서부터 산정까지 죽 이어졌다고 한다. (사진설명: 강백만장원의 마당) 자신의 조선소에서 무은 강씨가문의 커다란 선박들은 강백만장원내의 부두에서 출발해 황하를 거쳐 당시의 도읍인 베이징과 중국 중부의 항주(杭州)까지 왕복했다. 사천(四川)의 유문채(劉文彩)장원과 산동(山東)의 모이흑(牟二黑)장원과 함께 중국 삼대 장원으로 인정되는 강백만장원은 세 장원중 규모가...
판다번역 2013.09.07 추천 0 조회 2264
(사진설명: 아름다운 민가 공왕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9 중 두번째인 공왕부(恭王府)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 Beijing)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택이다. 또한 청(淸)나라의 역사를 읽을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장 한적한 낮에 북해(北海)공원의 뒷문 맞은켠으로 뻗은 아늑한 골목에 들어서면 지난 이백여년동안 자자손손 왕부와 함께 살아오는 주민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사진설명: 왕부앞의 골목) 바로 곁에 왕부의 키 높은 담을 두고 살면서 그들은 기 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왕족의 생활을 부러워하지도 않으면서 그들만의 평화로운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골목어귀에는 간편한 자전거 수리소가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하고 마당안 빨래줄에는 금방 세탁한 어느 집 꼬마의 색바랜 인형이 걸려있다. 대문앞에는 변함없이 노인들이 모여 치열한 장기전을 치른다. (사진설명: 공왕부의 화원) 예로부터 베이징은 자금성(紫禁城)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돈 많은 부자들이 살고 서쪽에는 신분이 높은 귀족들이 살았다. 서쪽에서 급별이 가장 높은 건물이 바로 이 공왕부이다. 청나라 건륭(乾隆)제때인 1776년에 건륭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당시의 대학사(大學士) 화신(和珅)이 황제로부터 이 땅을 하사받고 그 위에 자신의 저택을 호화사치판으로 지었다. (사진설명: 공왕부의 은안전) 오늘날 보수를 거친 공왕부는 화원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메인 건물인 은안전(銀安殿)이 있는 중심선과 양쪽의 두 통로에는 푸른 오지기와를 떠이고 붉은 기둥을 한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웅장하고 호화로운 은안전은 과거 공왕부에서 의식이나 행사를 치르던 장소이다. 1900년대 초반에 화재로 은안전과 두 별채가 재더미로 되었는데 수선을 거쳐 다시 원상복귀시켰다. (사진설명: 공왕부의 후조루) 은안전을 지나 중심선을 따라 계속 뒤로...
판다번역 2013.09.04 추천 0 조회 2519
(사진설명: 아름다운 민가 왕가대원)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9 중 첫번째인 왕가대원(王家大院)은 민간의 황궁으로 불리운다. 왕가대원은 규모와 레벨은 물론이고 문화적인 차원과건물의 장식예술적 차원에서 모두 중국 북방 가옥의 건축예술을 집대성했다고 할수 있다. 산서(山西)성 영석(靈石)현 정승(靜昇)진이라는 낯선 도시가 중국 최초의 역사문화도시로 선정된데는 그 소도시에 바로 왕가대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웅장한 왕가대원) 수십채의 뜰을 가진 보루식 건물들이 동쪽과 서쪽 두 구간으로 나뉘어 산세를 따라 첩첩하게 자리잡고 있다. 높고 낮게 즐비한 건물들속에는 우아하고 정교한 석각과 벽돌조각, 목각물이 화려한 수를 놓는다. 팔백여년전의 원(元)나라때 정승(靜昇) 왕씨의 조상이 이 곳에 이르러 농사를 짓는 한편 두부장사를 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청(淸)나라때인 1673년 왕씨가문은 청나라 정부군이 반군과 싸우는데 말 24필을 지원해 황제의 표창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청정부의 힘을 빌어 더 큰 장사를 벌이게 되었다. (사진설명: 왕가대원의 조각) 그 뒤에는 왕씨가문에서 과거급제를 통하거나 돈을 쓰는 등 방법으로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최고로 정2품직에 오른 사람도 있다. 농사로부터 장사에 이르고 장사로부터 관리에 이른 왕씨가문은 청나라 중반에 이르러 현지의 4대 갑부로 되었다. 왕씨가문은 장장 오백여년동안 대대적인 공사를 계속해 저택을 신축하고 사당과 패방을 세우며 묘를 조성함으로써 방대한 규모를 형성했다. 왕가대원은 최고로 "골목 3갈래, 보루 4채, 사당 5개"를 보유했는데 그 중 현재 개방된 구간은 번성기의 1/4정도에 달하는 골목 1갈래, 보루 2채뿐이다. (사진설명: 왕가대원의 입구) 대원의 입구는 키 높은 동문(東門)에 있다. 뜰 두 개를 거느린 보루 고가애(高家崖)는...
판다번역 2013.09.03 추천 0 조회 2225
(사진설명: 아름다운 옛동네 형자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옛동네 8 중 여덟번째인 형자관(荊紫關, Jingziguan)은 교통중심의 관문이다. 형자관은 서북에서 발원해 동남향으로 비스듬히 흘러 중국 최장의 하천인 장강(長江)에 흘러드는 한수(漢水)기슭에 위치해 있다. 남북향 물길을 끼고 한때 상업이 발달되고 온갖 업계가 집중되어 중심 부두역할을 했던 형자관에는 명청(明淸)시기의 고건물들이 오늘날까지 완정하게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형자관의 구도시) 오늘날 형자관 구도시의 주민들, 특히 젊은이들은 대부분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선 신도시로 옮겨가서 노인들만 구도시에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고요한 구도시의 거리를 거닐면 자신의 발자국소리만 들릴 정도이다. 하지만 평랑궁(平浪宮)과 산섬회관(山陝會館), 우왕궁(禹王宮)을 비롯한 명소들은 잘 보수되어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 풍부한 민속을 그대로 펼쳐보인다. (사진설명: 형자관의 거리) 형자관은 남북향으로 흐르는 중국의 주요 물길인 한수기슭에 위치해 있다. 형자관의 북쪽에는 부유하고 넓은 벌판인 팔백지 진천(秦川)이 펼쳐지고 남쪽에는 물산이 풍부한 자초(紫楚)평야가 있다. 하남(河南)과 섬서(陝西), 호북(湖北) 세 성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형자관은 예로부터 남북으로 오가는 화물이 집중되어 상업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 철도와 도로가 수로를 대신하면서 형자관은 점점 쇠락해지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고요한 형자관 일각) 많은 옛도시나 옛동네의 번성과 몰락의 과정을 살펴보면 모두가 지리적 위치와 연관된다. 교통중심에 위치해 물자가 집결되면 번성하고 다른 원인으로 물자가 줄어들면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다. 변화하는 사회에 직면해 그 중 일부는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면서 과거의 문화재와 유물을 버리고 새롭게 변신하고 일부는 여전히 불편한 교통 등 여건으로 어제의 모습을 유지한다. (사진설명: 형자관의 건물과 정원) 형자관이...
판다번역 2013.09.03 추천 0 조회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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